제주신문
기획특집평화 인권 제주의 도약
3000년 이어온 우리의 노비제도, 실제 노예제도 였다2. 역사로 본 우리의 인권사
김용덕 기자  |  kydjeju@jejupr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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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20  16: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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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신문=김용덕 기자] 우리나라는 서양의 노예제도와 같은3000년의 노비제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기자조선부터 1894년 갑오개혁(신분제 폐지)까지 사람들은 신분제도의 틀 안에 갇혀 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신분제는 왕족, 문반, 무반, 중 인, 상민, 천민이라는 6등급제를 뒀는데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구분, 지배층을 형성한 소수의 왕족과 귀족(양반)들은 인권을 존중받는 삶을살았다.

반면 피지배층을 형성한 대다수의 국민(백성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철저히 인권을 무시받으며 생존에 급급한 삶을 살았다.

노비제도는 왕실의 재산인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었는데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 사노비는 양반가의 일꾼이자 몸종이었다.

특히 노비, 기생, 백정, 광대장이(대장장이 옹기장이) 승려, 무당, 상여꾼을 팔천(八賤)이 라 해 지배계급의 노동력 착취 여성 성착취 대상이었다.

또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모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노비는 성조차 없는 이름을 불렀다.

이는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열등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천민 계급들에게 붙혀진 이름을 보면 물이 나 식물, 얼굴, 성격, 시간 등에 빗대 흔하고 천하게 지었는데, 사극의 단골 이름인 갑돌이와 갑순이, 돌쇠, 마당쇠, 언년이, 간난이 심지어 동물이름인 개똥이(갓동이 실동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두꺼비 그리고 어린놈, 작은년,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막말 이름을 붙였다.

그나마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뜻의 다물살이나 이쁜이, 꽃분이, 곱단이, 바우라는 이름은 나은 편이다.

또 사법기관조차 지배계급과 분리해 노비 문서를 증명하는 기록을 보관하고 노비 소송 업무를 다루는 장예원이라는 전담기구 두고 노비들을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토록 했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15~17세기 조선 인구 900만~1200만 명 중 노비 비중을 30~40% 로 잡을 경우 270만~480만 명쯤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행히 조선시대는 격쟁(擊錚)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징이나 꽹 과리를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상언(上言) 조선시대 신분에 관계없이 억울한 일을 문서로 임금에게 호소하는 제도, 신문고(申聞鼓) 조선 태종(1401년)에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이 직접 해결해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 삼복제(三覆制) 고려와 조선시대 사형 에 대해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세 번의 재판을 거치도록 한 제도가 있었다.

1801년 순조가 공노비 3만6974구와 사노비 2만9093구를 모두 양민으로 전환하고 노비신분을 대물림을 폐지했지만 1894년 완전한 철폐가 이뤄지기까지 100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결국 노비들 스스로 장예원의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신분 해방까지 300년이 걸렸다.

최초 여성 인권제의 시초 우리나라의 인권제는 여성근대권리를 내세운 여권통문(女權通文) 이 시초다.

지금부터 121년전 1898년 9월 1일 여권 통문 이 발표됐다. 여권통문은 "…이천만 동포 형제가 …신식을 좇아 행할 사이 …우리 여인들은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규방만 지키고 …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가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 리오"라는 내용이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근대 권리를 내세운 매우 뜻 깊은 것이다.

남녀 교육 직업 평등과 여성의 정치참여권을 달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문서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는 남녀가 일반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재주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자란 뒤에 사나이와 부 부지의로 평생 살더라도 그 사나이에게 조금도 절제를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극히 공경함을 받음은 다름이 아니라 그 재주와 권리와 신의가 사나이와 같은 까닭이라며 성평등을 주장했다.

여권통문이 발표되자 우리나라 전국민이 화들짝 놀랐다. 당시 독립신문은 여성 교육에 막대한 돈이 있어야하니 정부기구에 불필요하게 쓰이는 20여만원과 급하지 않은 군사 증액비 100여 만원을 모두 여성 교육비에 쓰라고 기사화했다.

여권통문은 독립신문 영문판인 The In dependence 에도 실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인권사의 역사다.

<본 기사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의 지원으로 취재,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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