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장독대, 연신 고개 숙인 노란 해바라기가 미동도 없이 젖은 대지를 내려 보고 있다. 언제쯤이면 장판지만한 꽃대를 피울 것인지 줄 곳 기다렸지만, 송편만한 꽃잎을 피우고 꼿꼿이 서 있는 모습에 쓰렁쓰렁한 나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허나, 촉촉이 내리는 비에 꽃잎 적시는 모습이 너무나 처량해서 가엾다.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 날이 개고 가을햇살이 비추면 향기 그윽한 꽃망울을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연민의 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침울한 가을 장맛비에도 한가위는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기쁨이고 환희의 계절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이 있다. 한가위란 무엇일까. 풍요로움이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동그랗게 어둠을 밝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로움을 주지 않는가. 고향을 떠난 이들은 추억의 열차를 타고 고향의 고샅길을 지나 정낭을 넘어선다. 그 뿐인가. 벌써 고향 마을 어귀에는 고향 찾는 이들을 반겨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한가위는 떠난 이들과 남아 있는 이들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와도 같다.

이즈음 제주에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다. 벌초다. 한가위에 자손들과 풍요로움을 함께 하기 위해 조상들의 봉분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음력 초하루 전후 일요일 들판은 벌초하는 후손들의 행렬로 산야를 덮는다. 풍습이란 어떤 법률로 정한 것이 아니라 가문가례로 이어오는 도덕이며 집안의 규범이다.

가을 장맛비가 주춤거리던 일요일 새벽,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조상의 산소를 소분하고 한가위 명절을 지내기 위한 연례행사다. 묘지에는 안개 같은 가을 장맛비가 마냥 지분거리고 있다. 봉분들은 즐비하게 늘어서서 후손들이 방문을 기다리는 듯 고요하고 적막하다. 기다랗게 자란 억새풀과 개망초들을 헤치며 아버지 산소 앞에 섰다. 안개비에 젖은 비석에는 잔 이슬이 내려 앉아 골을 타 내리고, 봉분 위에는 잡초들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시가 달린 엉겅퀴, 쑥들로 엉성한 모습이어서 속상했었는데, 봉분을 덮고 있는 잔디들이 푸르스름하다. 어언 서른 해가 되어가는 봉분에는 사별의 슬픔을 담은 막내 동생 친구들의 도움으로 입힌 잔디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지나간 세월의 냄새가 흘러 가슴으로 다가온다. 마치 살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간 드리지 못한 안부의 말을 드린다. 침소는 평안하시냐고. 참으로 힘들게 사셨던 아버지의 삶이었다. 1906년 출생은 그분에게 고난의 시작이었다. 조선왕실의 나약함으로 인한 일제의 침탈은 주권이 상실된 사회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거듭하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자식들을 호열자라는 병명으로 모두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 아픔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 그뿐인가. 4·3으로 인한 질곡의 삶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일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에게 변혁의 물결은 의지에 속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가 어떻고, 자유주의가 어떻다는 것을 받아들일만한 지식이 없었던 그분에게 돌아온 것은 양쪽 모두에게서 오는 채찍과 고통이었다. 폭력의 시대였다. 왜 그랬을까 죄 없는 선민에게. 힘없었던 조선왕실에서 시작한 국가의 나약함이다. 왕실의 존엄이 우선이고 백성들의 안위는 도외시했던 위정자들의 무책임함이 아니었을까. 살 만한 요즘,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를 이념의 잣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관용과 너그러움의 시각으로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관용은 인간관계를 보다 따뜻하게 만든다. 마치 한가위에 뜨는 둥그런 보름달의 모습처럼 환한 미래를 비추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올 한가위는 축제의 만찬이며 희망찬 삶의 자리를 이어가는 징검다리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