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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의 기억
김구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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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03  15: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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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햇볕이 따갑다. 볕이 아깝다고 깔고 누웠던 이부자리를 마당 빨랫줄에 널었던 소싯적 어머님 생각이 나서 텃밭 빨랫줄에 나란히 널었다. 훌훌 먼지를 털고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반쯤 얼굴을 내민 빨간 장미 한 송이, 며칠 전 심어놓은 고추 적상추 오이 가지들이 새벽이슬을 잔뜩 먹었는지 싱그럽다. 올여름에는 자리물회를 직접 키운 푸성귀들을 가지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된다.

먹고사는 일에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생활이 나아졌지만, 지난날을 잊을 수 없다. 춥고 배고팠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제삿날 음복하고 남은 음식을 옆집 할머니에게 보내는 차롱을 나에게 맡겼다. 어두운 밤길 담벼락을 집어가며 찾아가 할머니하고 나지막하게 부르면, 기다리기나 했듯이 방문을 열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릇을 바꿔주었다. 그때 할머니의 고운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동네 이웃의 인심은 따뜻했었다. 그 시절 밥 한 톨을 버렸다가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야단맞았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런 서러움이 배어 있기에 불우한 이웃을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우리 고유의 정서 속에 묻어 있는 것이다. ‘가을 식은 밥이 봄 양식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보릿고개 시절을 겪어 본 세대는 배고픔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간직하고 있다.

푸더지멍 도(ㄷ+아래아)모리 까지거나 솔(ㅅ+아래아+ㄹ)찢어진 것사 놔두민 아물쥐마는, 옷 찢어진 것이 너미나 울끈 호(ㅎ+아래아)더라.”

넘어져서 무릎 다친 것과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나는 것은 그대로 두고 있으면 아물어 없어지지만, 옷이 찢어져 헤어진 것이 너무도 마음이 쓰리더라는 말이다. 몸에 난 상처는 참고 지낼 수 있지만, 새로 장만해야 하는 옷에 대한 서러움의 표현이다. 빈곤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민초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미완의 봄은 코로나19사태로 잃어버린 암흑이었고,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은 그동안 멈춰버린 일상의 회복을 위해 견디기 힘든 고통이 닥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하지만 넘기 어려운 고개를 넘어왔기에 코로나19 이후의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IMF도 겪었고, 그보다 더 큰 시련이 닥쳐왔지만, 그럴 때마다 앙금처럼 남아 있는 배고픔의 서러움을 거울삼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에게 보릿고개의 서러움을 이야기하면 케케묵은 원시적 이야기로 치부해 버린다. 우리 세대를 마처족이라 하지 않는가. 부모를 공경하는 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으로부터 공경받지 못하는 음 세대를 뜻한다고 한다. 참 희한한 신조어다. 소중하게 키웠던 자식들이 부모를 내팽개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의 편리만을 위해 부모들의 고향을 밀어내는 신세대들에 대한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고 과거를 흘러간 도랑물로 여겨 기억에서 사라져서는 미래가 없다.

오월에는 가족들과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가진 게 많지 않다는 것은 다소 불편하고 궁핍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든 삶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을 때 다가오는 환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열매인 것이다. 진정, 행복한 삶이란 서로를 인정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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