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문
오피니언제주칼럼
손 글씨
임창준  |  객원논설위원 / 전 제주도기자협회장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6.09  17:13:2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20여 년 전 필자가 중앙일간지 기자로 근무할 때 갑자기 3개월 후부터 기사 작성 등 모든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할 예정이니 사전에 준비하라는 알림글이 사내 게시판에 떴다. 편집국 내에 종이(원고지)가 사라져 컴퓨터 워드로만 기사 작성이 이뤄진다는 얘기였다. 필자는 한참 당황했다. 손재주가 별로 없는 형편에 그 수많은 컴퓨터 자판을 일일이 찾아 두드리는 작업을 어찌할꼬? 필자가 퇴직하는 날까진 그대로 펜으로만 작업했으면 좋으련만.

IT시대로 발전함에 따라 컴퓨터 시대도 도래하고 있다는 걸 느낀 필자는 신문사를 관두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퇴근하고서는 지급받은 컴퓨터(노트북)를 열어 가갸거겨구규종달새 부엉이 산토끼등의 글들을 키보드 자판에 두드리며 연습에 열중했다. 한쪽 손으로만 사용하는 게 당장은 수월했지만, 정석대로 어렵지만 양손으로 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나갔다. 처음엔 서툴고 어색하던 실력이 4~5개월 되니 부쩍 늘어 양쪽 손으로 자판을 보지 않고서도 쉬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이후 1년쯤 지나니 자유자재로 자판을 보지 않고서도 빠른 속도로 키보드 작업을 할 수 있었고 컴퓨터 타이핑 아니면 글을 쓸 수 없을 정도까지 발전했다. 당시 후배 기자보다 내 능력이 더했다.

어느덧 원고지는 불편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이 칼럼도 자판을 두드리며 쓰고 있음은 물론이다. 요즘 사회 구석구석엔 쓰기 문화가 온통 컴퓨터 타이핑으로 변모한 지 오래됐다. 그러다 보니 손 글씨로 쓴 편지나 알림 글을 이따금 보게 되면 새록새록 정감이 가고 친밀해진다. 펜을 쥐고 글 쓰는 일이 급감하고 있지만, 한 글자씩 눌러쓰며 문장을 곱씹는 손 글씨의 매력은 여전하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시대에, 특히 이렇게 IT 기반이 잘 갖춰진 우리나라에서 손 글씨가 웬 말이냐. 타이핑 몇 번 하면 끝날 일을 굳이 손으로 써야 하느냐라는 말을 곧잘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말을 전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손 글씨(writing)는 손으로 쓴 글씨. 곧 어떤 기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연필이나 붓 등의 직접적인 도구를 활용하여 손으로 쓴 글씨를 말한다. 주로 기계적 또는 도식적인 개념의 활자와 구분하여 표현할 때 사용한다. 대부분의 손 글씨는 직감적인 표현으로 쓰이므로 글자 표현의 영역 가운데에서도 개성 있고 창의적인 표현의 가능성이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손 글씨엔 사람의 체취와 향기가 진득진득 묻어난다. 디지털 시대지만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는 손 글씨 쓰기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얼마 전 서울에 사는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30여 년 만에 제주에서 살던 한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60대 초반의 고인권씨다. 그와 필자는 20~30대 시절 자주 만나 소주·막걸리를 하며 사회를 논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도 할 정도로 절친했다. 한참 추억을 소환해 30여 년 전의 일들을 반추하고 곱씹으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겼다. 그는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마친 후 지금은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했다. 보름 쯤 지나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펜으로 꾹꾹 눌러쓴 손 편지였다. 하도 오랜만에 손 글씨를 보는 순간 너무 반가워 세 번 네 번 읽고 또 읽었다.

요즘 눈부신 과학·디지털 시대에 일부에서 손 글씨의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손 글씨야말로 과학을 넘어서는 사람의 마음이며 정신이다. 손 글씨는 퇴보하는 일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고 나를 바로 세우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