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문
기획특집탐라 돌하르방 역사 설화 길따라
탐라부터 조선까지…정치·행정·문화 중심지 ‘우뚝’11. 제주성 목관아
제주신문  |  jejupress@jejupres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8.26  17:31:3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제주성지와 제이각.

 제주목성을 지키던 돌하르방이 산업화 영향으로 현재로 이동된 위치를 추적, 정리한 바에 의하면 예전에 돌하르방은 제주목 관아로 들어오려면 에스(S)자 형태의 골목(세찬 바람을 완화시키고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음)에 30여 m의 거리를 두고 두 쌍씩 8기가 이중의 관문을 만들어 검문을 통과해야 성문 안에 입성하도록 하는 수문장 역할을 했고 전염병 예방이라는 주술적 기능과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 다는 신앙적 기능, 정낭을 걸쳐 놓는 높이에 따라 통행 안내를 나타내는 역할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헌자료 현장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돌하르방의 위치, 크기, 목성의 둘레나 높이도 약간의 차이가 있어 혼선을 빚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한국해양아동문문화연구소’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로 ‘이미 7기가 확정’을 ‘이미 8기가 확정’으로 바로 잡는다. 이어서 특별한(해외 등) 제주 돌하르방에 대해 계속해 소개가 될 것이다.

□ 제주성지

 제주성은 제주시내의 중심지를 빙 둘러(남문, 치성, 남수구, 동문, 북수구, 서문 순) 축조됐다. 성 안에는 영주협당(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제주 목과원(18세기 후반에 제작된 ‘탐라방영총람’에 따르면 제주성 안에 동서남북중과원 5개와 별과원 1개 합 6개의 과원이 그려져 있다. ‘증보탐라지’에 따르면 과원에는 감자, 당금귤, 동정귤, 유감, 청귤, 산귤, 당유자, 탱자, 치자, 등자 등이 심어져 있는 것으로 기재), 제주목 관아, 관덕정, 향사당, 귤림당(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던 곳), 망경루(임금이 있는 서울을 향해 은덕을 기리는 신지), 연희각(목사가 집무를 보던 곳), 동헌내아지, 우련당(못을 파고 물을 가둬 연꽃을 심은 곳에 세운 정자), 회랑지, 홍화각(절제사가 업무를 보던 곳, 절제사는 조선 초기 의흥친군위에 두었던 서반 무관직이다. 정3품 당상관 서반 무관 외관직이다. 병마절제사는 처음에 전주와 경주에만 뒀다가 후에 광주와 의주에도 두고 부윤이 겸임했다. 수군절제사는 실제로는 없었고 다만 제주에 병마수군절제사를 목사가 겸임했다), 군뢰청(죄수를 관리하던 군졸들이 업무를 보던 곳), 호적방(관아의 행정업무와 민원인들에게 증명서를 발급해 주던 곳), 애매헌지(탐라순력도에는 나타나 있지만 18세기 문헌에는 없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등이 있었다.

 1411년(태종 11년) 정월 제주성을 정비토록 명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성은 1411년 이전에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둘레는 13㎞가 넘는다.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 사이에 축성된 규모를 말하며 지금 성곽의 기초가 되고 있다. 1565년(명종 20년) 목사 곽흘이 을묘왜변(제이각 측면 어느 길가 벽에 자세히 삽화로 그려져 있음)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성곽의 규모를 확대하고 격대와 타첩을 갖췄다. 1599년(선조 32년) 목사 성윤문이 성벽의 높이를 더 높이는 등 지금 성벽의 모습을 갖췄다. 1780년(정조 4년) 목사 김영수가 산지천이 범람해 민가에 피해가 많자 이를 대비해 간성을 축조하는 등 지속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면서 제주성의 옛 자취는 대부분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성벽은 조상들의 측성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제주목 관아

 왕→전라도관찰사(종2품)→제주목사(정3품)·제주판관(종5품)→정의현감(종6품)·대정현감(종6품)의 계열로 제주를 다스렸다. 여기서 제주판관은 제주목사를 보좌하는 직책이다. 이는 조선시대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1목 2현 체제로 편제돼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하에 있었다. 전라도와 거리가 멀어 목사는 현감을 관리하는 역할을 권한, 이양 받아 감독 규찰해 나갔다. 제주목사는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 기능 수행도 겸했고 형벌, 소송, 세금, 군마, 왜구 방어 등 제주의 모든 행정을 처리하고 후에 1년에 2회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고했다.

 제주를 다스리는 목사가 일을 보던 주변 일대를 목관아지라하는데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도의 중심지 구실을 한 중요한 곳으로 동헌·내아 건물터 등이 있었다. 제주목 관아시설은 1435년에 골격이 이뤄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됐다.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년)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해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뤄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됐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돼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 돌하르방 코로나 19 수칙

 특정 지역에서 2주 평균 일일 확진자(국내발생) 수가 100명~200명 이상 발생하거나 일일 확진자 수가 2배로 증가하는 ‘더블링’ 현상이 일주일 내 2회 이상 발생한 상황이 오면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를 발동할 수 있다.

 집합·모임·행사, 10인 이상(실내외 구분 없음)이 대면으로 모이는 사적·공적집합·모임(결혼식, 동창회, 동호회, 야유회, 회갑연, 돌잔치, 워크샵, 계모임, 친목모임, 가족모임 등), 행사(전시회, 박람회, 설명회, 공청회, 학술대회, 기념식, 수련회, 집회, 페스티벌·축제, 콘서트, 싸인회, 강연 등)에 대한 조치가 이뤄지니 이에 잘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사진= 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소장)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제주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고충처리인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63113)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공로 9-1(도두일동)  |  대표전화 : 064)744-7220  |  팩스 : 064)744-7226
법인명: ㈜제주신문  |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제주 아 01014   |  등록일 : 2007년 2월 12일  |  대표이사/발행인/편집인 : 전아람
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아람
Copyright 2011 제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ejupress@jejupre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