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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슬바람이 불면
김구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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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1.01  17: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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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소슬바람이 불면 가슴 아린 옛 추억이 아스라이 스며든다. 신새벽 아버지의 분주한 손놀림은 하루 걷어 들일 밭일에 대한 준비작업이다. 일손은 부족하고 5월 장마에 심어놓은 고구마, 콩 수확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환갑을 넘은 노부모에게는 짧은 해가 아쉽기도 했겠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농사일이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다. 그런 부모들의 삶이 농사일로 태어난 외양간의 일소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늦은 나이에 육남매를 낳았으니 양육에 대한 책임의 짐은 누구보다도 무거웠을 것이다.

 갓 중학생이 된 나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밭일을 해야 했다. 일요일이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늙은 암소가 끌고 가는 달구지에서 새우잠을 청하지만, 포장 안 된 고샅길을 지날 때는 그것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동이 트는 새벽 고구마밭은 넓은 푸른 초원같이 넓게만 보였다. 아버지가 쟁기를 채우고 밭을 갈며 나아가면, 어머니와 우리는 호미를 들고 주먹 크기의 고구마를 캐어 고랑으로 모아나간다. 고구마 캐는 작업은 그래도 재미가 있다. 전날 밤 어머니가 만들어준 지네 주머니를 옆에 끼고 있다가 흙 속에서 기어 나오는 지네들을 잡아서 넣을 때마다 흥이 났다. 제주도 호미인 골갱이는 지네 잡기 아주 편안하게 만들어져 있다. 끝이 뾰쪽해서 살살 도망가는 지네의 머리를 잽싸게 누르고, 왼손으로 머리를 잡아 이빨 두 개를 오른손으로 떼어내어 주머니 통에 넣고 주둥이를 뱅뱅 말아주면 그만이다. 한 번에 여러 마리가 나올 때 순간 이빨에 물리면 퉁퉁 부어오르지만 아픔보다 잡은 지네의 숫자가 내게 준 큰 기쁨이다.

 지네는 한 마리에 오십 전이었다. 열 마리면 오 원, 오 원이면 영화 구경 한번 할 수 있는 돈이다. 언젠가 오 원으로 여자 베트콩 18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기에, 고구마밭에서 제일 먼저 눈에 비치는 것은 언제나 고구마가 아니라 새빨간 지네였다.

 한낮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하얀 양떼구름들이 유영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웠지만, 밭일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낭만이다. 고구마와 지네가 얼룩진 시간이 끝날 즈음에는 홍시 같은 노을이 천천히 서산마루를 넘어가는 어둑한 시간이다. 흙 범벅이 된 얼굴로 밭을 돌아보면 오늘 작업한 양은 겨우 손톱만큼. 노부모들이 주 내내 해도 감당이 되지 않을 양이다.

 일교차가 심한 계절이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침 길과 같이 춥고 시리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점방으로 달려간다. 지네를 팔기 위해서다. 세 사람이 잡은 지네는 쏠쏠하다. 하루 잡은 양이 대략 오십 마리는 넘는다. 십 원짜리 지폐 두 장에 오 원짜리 지폐 한 장, 이십 오 원이면 동생과 나의 용돈으로 푸짐한 품삯이겠지만, 어머니가 오일장에 가면 열흘가량 먹을 식구들의 반찬거리 살 비용이다. 어머니께 드리는 것이 조끔은 아깝다는 생각이지만 동생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힘들었던 시절 동생의 순수했던 눈망울이 선하다.

 농촌에서의 가을 소슬바람은 그렇게 불었고, 그렇게 고생했던 노부모는 그 바람결에 실려 다시 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아이들도 농촌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도 가을 소슬바람은 불어오지만, 옛 바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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