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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이 불면
김구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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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0.04  17: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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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인가 보다. 가을 초입에서 느끼는 싱그러운 바람이 무기력한 영혼을 깨운다. 아스라이 피부로 스며드는 촉감은 사랑하는 이의 입김과도 같이 보드랍다. 봄의 향기를 좋아했던 젊은 날의 느낌보다 가을을 더 좋아하는 이유다. 추운 겨울날을 지낸 육신의 후줄근함에서 맞이하는 봄의 따스함은 나른한 일상을 주지만, 여름날 햇살에 지친 나에게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는 가을의 기운은 또 다른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산과 들을 훑고 다니는 바람결에 섞여오는 풀꽃 향기, 언덕을 넘어온 산들바람을 만나면 추억 속에 그리운 이를 만난 듯 설렌다. 날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오묘한 자연의 신비로움, 나는 좋은 땅에 떨어진 민들레의 씨앗과도 같이 행복하다.

시인 닐케의 가을날에서 마지막 남은 햇빛에 대한 감사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오늘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과 함께 불어오는 갈바람의 풍경은 너무나 포근하다. 시나브로 고향의 작은 초가집 마당으로 달려간다. 멍석 위에 널려있는 콩깍지를 골라내는 어머니의 손길과 키질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마치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의 명화를 보는 것처럼.

가을이면, 소싯적 저녁노을 지던 초가집 정지에서 굽던 모슬포 자리 냄새가 그립다. 공천포 자리보다 덩치가 커 기름기가 많은 자리다. 참깨를 떨고 난 바싹 마른 줄기를 태운 불에서 지글거리며 떨어지는 기름에 다시 노랗게 구워지는 자리돔의 속살은 진미다. 배고픈 이에게 최고의 것은 군침을 돌게 하는 식욕뿐일 것이다.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는 보물, 욕심난 바람이 불덩이와 함께 훔치고는 좁은 동네를 휘감고 돌았다. 바람이 가는 곳마다 구수한 자리돔의 냄새는 동네를 풍성하게 했다. 비록 작은 물고기였지만, 진수성찬의 밥상이나 조촐한 밥상 구분 없이 먹는 이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 풍요로움 속에는 한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시기와 질투가 없는 평온한 모습, 아름다움은 사랑이라는 불이 타오른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세상의 어떠한 권력과 재물, 육욕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샘물이 솟구쳐 그것을 마시는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소유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으며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것, 보통의 인간으로는 가질 수 없는 거룩한 것이라 본다. 가질 수 없기에 인간은 질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언젠가 고슴도치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별로 크지도 않는 동물이면서 걸음걸이가 아주 부자연스럽다. 등에 돋아난 가시들 때문이다. 몸집이 작은 동물이라 천적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독을 가진 가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보통 한 마리에 오천여 개의 가시가 있다. 이 많은 가시를 가지고도 서로 사랑을 하고 새끼를 낳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종족 보존을 위해 그들은 관계할 때 가시와 가시 사이를 잘 연결해서 서로 찔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행동을 한다고 한다. 암수의 가시를 합치면 만 개가 되는 가시들을 서로에게 찔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고슴도치만큼은 못하겠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할 수 있다면 가시의 고통을 안고도 서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작은 미소, 내가 나눈 작은 봉사 때문에 누군가 기뻐할 수 있다면 인생을 살아갈 의미가 있다.

갈바람이 불면, 한여름 뜨거웠던 가슴을 식히고 누군가의 가슴에 기억으로 남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삭막한 인생길에서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것도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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