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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정만 편집국장 |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무려 8남매를 낳았다. 이 시대, 한 아이도 낳기를 싫어하는 신세대 같아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이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던 가족계획이라는 국가정책이 나오기 훨씬 전이다. 임신해서 태아교육이 어디에 있을 때며, 전문산파나 있을 때인가? 그저 친정 아니면 시어머니나, 동네 ‘삼춘’ 할머니의 도움으로 집에서 자연분만을 했다.
아기를 낳아놓고도 2주가 지나 훌훌 털고 일어나 밭으로 일 나갔다. 때는 6월이라 여간 덥지 않았다. 하지만 벌여 놓은 농사일이 그녀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었다. 아기는 젖을 먹여야 하기 때문, 밭으로 업고 갔다. ‘애기구덕’도 함께 가져가 밭 한켠 차지한 나무그늘에 놓고 아기가 자다가 깨어 울면 하던 호미질을 멈추고 젖을 먹였다. 갈적삼을 가슴위로 올리고 머리에 썼던 광목 수건으로 가슴을 닦아 젖을 물리면 아기는 다시 새록새록 잠이들었다. 제 어미가 해야 할 일을 아는 양, 보채지 않았다.
아버지는 학교 훈장이라 출근을 했고, 집에는 학교를 간 아이들 외에 학령(學齡)에 미치지 못한 두 형제가 놀이에 빠져 있다. 마루에는 보리밥 한 양푼이 조그만 밥상에 조각 보자기로 덮여 있다. 집에 있는 아이들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가 파하고 집에 오는 점심시간에 먹도록 마련해 둔 것이다.
살레(찬장)에는 마늘장아찌 등 속의 찬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것으로 밥을 먹으면 될 것이었다. 고기반찬은 설이나 추석 때 먹는 귀한 음식이어서 평소 밥상에 오르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헐벗고 굶주리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집안 형편이 좋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점심시간 후에는 역시 밭으로 일을 나간 시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오시면 도움이 크게 될 터였다. 그녀의 집에서 500m쯤 떨어진 큰댁 바깥채에 사시는 50대 후반의 시어머니는 안채에 사는 큰댁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농사지어서 자급자족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종가집 재산을 모두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바깥채에서 생활하면서 더러 직접 농사를 지었다.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 오전 여름의 열기가 올라오기 전 밭일을 다 마치고서는 집 가까운 작은 아들네 집으로 가서 아기를 돌봐 주는 일이 할머니의 일과나 다름없었다.
당시 학교 훈장이라고 해 봐야, 밀가루나 쌀이 월급으로 지급되던 시절이었다. 도움이라면 학교에 배급되던 석유를 얻어다 등잔기름으로 쓸 정도였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있는 집안 형편으로는 돈을 벌어야 했다.
밭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허기를 때운 어머니는 애기구덕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바다로 나갔다. 물질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일이었다. 미역철이면 미역을 따서 말려 팔았고, 한겨울을 빼고는 물질로 전복과 소라 등을 따서 어촌계로 넘겨 팔아, 월말이 되면 정산을 해서 돈을 손에 쥐었다.
아기는 이제 시어머니가 보고 있으니 마음놓고 물질을 할 참이었다. 아기는 젖을 많이 먹였으니 서너시간 물질을 하고 돌아오는 사이는 보채지 않을 것이었다. 잠시 보채면 어떨까, 시어머니가 있으니… 시어머니 또한 7남매를 낳아 하나도 잃지 않고 장성시킨 장본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그녀를 안심시키고도 충분했을 것이었다.
오후의 햇살은 뜨거웠으나 바다는 시원한 남동풍이 약간 불면서 잔잔했다. 해산하고 2주일, 정확히는 열이레만에 나선 물질이었다. 숨비소리를 내며 자맥질하면서도 그녀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오직 어머니만이 들을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빨리 나가서 집으로 가야지. 아기가 보채고 있을건데….”
펄펄 끓는 조바심을 안고 뭍으로 올라왔다. 태왁과 망사리를 맨 그녀가 집으로 향했다. 쨍쨍하던 햇빛도 지친 듯 이쯤에서 그만 이울고 있다. 집 담장 가까이 이르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아기 잘도잔다.” 아기를 달래는 시어머니의 자장가가 은근한 음률을 타고 마당을 가로질러 신작로로 조용히 새어 나오고 있다.
그녀는 먼발치에서부터 그 소리를 들었다. 보통사람은 들을 수 없는 거리인데 오직 그 어머니는 들을 수 있었다. 아기가 계속 울자 할머니가 자장가 가사를 바꿨다. “울지마라 애기야. 물질 갔던 니 어미가 다 왔다. 울지마라!”
8남매는 장성했고, 그 어머니는 92세가 되었다. 아프셨고, 죽음을 예감하자 그의 한 아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해 준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씀 하셨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할 말을 거꾸로 하고 계셨다. 92세,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앞뒀다.
임종하는 어머니가 8남매를 일일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막 임종에 이르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입 모양으로 마지막 남기고자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보통의 청각으로는 어림없었던 아기의 울음소리를 먼 길에서 들을 수 있었던 어머니처럼, 그들도 어머니가 그토록 하고자 하는 입모양의 말을 들어 새겼다. 제각각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만 하는 말이었다.
‘그리움’, ‘회한’…이제 노을지경에 있는 아들은 이 극히 상투적이지만 쓸쓸하고도 애수 가득한 두 단어에 사로잡혀 한동안 사념의 창가를 서성거렸다. 그 ‘화신(化身)’으로 다가온 어머니를 만났다. 어버이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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