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은 나에게 낯설고 물선 곳이었다. 바람 따라 들어온 섬에서 나는 또 하나의 섬이었다. 그런 나를 아무 사심 없이 아껴주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 이가 만농 홍정표 선생이셨다. 1991년 여름, 선생 댁의 문은 항상 나에게 열려 있었고 매일 찾아가도 마다 않으시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빛바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꽃꽂이를 가르쳐주시고 백자항아리를 보면서 옛 물건의 미와 자연의 귀함을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도 선생이 나를 가르치던 꽃그림을 가지고 있다. 연농 홍종시와 추사 김정희 이야기도 선생에게서 처음 들었다. 북교 제자들이 일본에서 사다 선물했다는, 렌즈에 곰팡이가 슨 작은 카메라와 그 카메라로 찍은 필름들을 보여주시면서 제주도의 풍습과 그들의 삶을 들려주셨다. 선생은 당시 84세셨고 젊은 나는 그를 통해 이 땅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배웠다. 선생께서는 나에게 자신의 사진 자료를 모두 줄 테니 목석원에 가지고 가서 백운철을 도와 완성하라 하셨다. 낯선 땅에서 또 다른 낯선 만남이 내키지 않았던 터라 시간을 지체하던 중 1992년 1월,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섬을 떠나있던 어느 날 제주대학교 박물관 고광민 학예사가 만농선생의 사진 작업 중이라며 선생께 들은 사진 설명을 문의해왔었다. 그리고 2017년 다시 돌아온 섬에서 선생의 사진 50점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진 자료실에 영구보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나 감사하고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시 젊은 외지인이었던 나에게 제주문화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진 자료의 소중한 가치를 깊이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툴렀을 내 손을 피해 자료는 제주대학교에 기증됐고 유럽에서 인정받고 있던 백운철의 인화작업을 거쳐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됐다는 것은 정말 잘된 일이다. 오늘, 『만농 홍정표선생 사진첩 제주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내 인생의 큰 스승이신 홍정표 선생님의 자취를 되새기고 있다. 평생 누구나의 스승이셨던 선생은 이 땅에 많은 제자들을 두셨다. 교실에서 배운 이들만이 제자가 아니다. 한라산인 부종휴, 천재화가 강태석, 제주돌을 깨워 문화로 일군 백운철은 선생을 자신들의 인륜지대사인 결혼식 주례로 모셨다. 선생의 언행은 직접 배운 제자는 물론 이 땅의 많은 젊은 지성들에게 귀감이 됐다. 선생이 이뤄 놓은 문화 예술 교육의 성과는 모두의 교과서요 배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