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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교향곡을 듣는 아침
정영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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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7.17  13: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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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이라 열지 않던 창문을 활짝 연다. 축축한 바람결에 실려 오는 아침의 기운을, 구름 속에서 빛나는 빛을 온몸으로 느낀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전원교향곡에 나의 아침을 맡긴다. 새봄이 열리듯 찬란한 소리가 싱그럽다. “숲속에 있으면 기쁘고 행복하다”라고 한 베토벤이 산책하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숲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1악장의 표제를 ‘전원에 도착했을 때의 상쾌한 기분’이라고 본인이 직접 붙였을 만큼 소리를 듣지 못했던 베토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평화로운 감정을 형상화하여 곡을 만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이웃에게 방해가 안 될 만큼 소리를 키운다. 숲속에 서 있는 듯, 자연의 평화로움이 생동하는 신비로움으로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어젯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빌며 잠자리에 들었다. 의사가 말한 그 한마디. “뇌출혈의 증상은 천천히 나타날 수도 있다”라는 그 말 때문이었다. 어떤 얄궂은 운명이 다시 나를 방문하는 것 같은 예감이 주는 두려움뿐이었지만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구했다.
 
 거울을 보니 메디폼으로 덮은 이마는 부어올랐고, 멍든 무릎과 왼쪽 손바닥 상처는 쓰라렸다. 응급실 의사는 어지러움, 두통, 시야 흐림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지만, 아직 특이한 증상이 없어서 그럴 필요는 없을 성싶다. 
 
 어이없는 사고는 발 헛디딤에 있었다. 퇴근 시간에 만난 P와 저녁을 먹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자며 간 시내의 한 카페. 멀리 새연교에 점멸하는 불빛과 어우러진 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담고, 높이 솟은 붉은 굴뚝이 기울어가는 해의 시계에 맞춰 긴 그림자로 눕는 것을 바라보며, 이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는구나’라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우리가 그저 매일매일 하는 수다, 하소연이 간간이 섞인 일상의 이야기들은 그 안도감에서 가지를 치고 나오는 것에 불과했다. 
 
 누가 삶에서 우연은 항상 구덩이를 파고 우리를 기다린다고 했던가. 쟁반을 들고 내려오는 P에게 조심하라며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린 그 순간 앞으로 곤두박질치며 콘크리트 기둥을 받았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 탓을 해서 무엇하리. 지나간 기억을 되돌려보니 어이없는 실수였으나 자꾸만 ‘만약에’란 설정이 뒤따른다. 
 
 만약에 내가 넘어지면서 이마가 아닌 코나 턱으로 받았더라면 뼈가 부서져 수술받고 병원에 누워있을 것이다. 만약에 머리의 정중앙을 부딪쳐서 뇌출혈을 일으켜 일각을 다투는 상태였다면 119를 부르고 야단법석을 치렀을 테고. 만약에 응급 치료에도 불구하고 인사불성이 되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P가 받을 충격, 카페 주인이 겪을 흉흉한 소문, 예상치 못한 불상사에 당황할 내 가족들. 신문과 방송의 사고 소식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의 놀람. 부고에서 장례까지. 나의 벗과 평소 나를 아껴줬던 이들은 나의 최후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았느냐’를 이야기하겠지. 생사의 갈림길을 용케 빠져나왔다는 다행스러움도 잊고 ‘만약에’라는 설정은 무한히 확장한다.   
 
 음악이 이끄는 데로 함께 들어간 숲길은 멀리 길게 뻗어 있고 나는 걷고 있다. 깊고 맑은 화음이 인도한다. 찬란히 빛나는 봄날의 숲은 살아있음에, 어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내가 숲이 되는 순간이다.
 
 성숙해진 여름은 소나기와 폭풍으로 계절의 위엄을 알리며 서서히 물러나고 가을로 접어든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농부는 누렇게 익은 들판의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마을 처녀들은 춤을 추며 수확의 기쁨을 표현한다. 안락한 시골 정경은 풍요로운 삶으로 흐른다.
 
 장마가 닥친 이 여름, 음악 속 가을의 정취에 나의 서정은 문을 활짝 열었고, 나의 심연은 지난가을 내가 갔던 숲에서 본 가을 나무들의 속삭임에 일렁인다.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이 자리에서 바라봤던 나무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나뭇잎 틈새로 빛의 알갱이들이 반짝인다. 빛의 무늬를 온몸으로 그리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기쁨이 느껴진다. 
 
 이 순간 틈을 비집고 살아나는 소리가 있다.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자동차 소리, 배수구를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 건물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아침을 여는 소리, 감흥이라고는 찾아 들을 수 없었던 왜소하고 거친 소리가 웬일인지 소란스럽지 않고 잔잔한 화음을 이룬다. 
 
 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일상의 소리.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 생애 첫날처럼 이 아침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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