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삼아 공원에 가보면 시비들이 곳곳 서 있다. 이 고장 시인들의 시를 새기고 세웠다. 이 중에는 돌아가신 이도 있지만 나이는 지굿하지만 한창 활동하고 있는 시인도 있다. 돌아가신 시인의 시는 그런대로 괜찮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추모를 위한 정성이 엿보이니까. 하지만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시비를 세우겠다는 사람은 욕심쟁이처럼 보인다.
제돈 들여서 시비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돈을 내어 만들라고 했으면 당최 사양했을지도 모른다. 돈이 아까워서 시비를 세우는 게 재산 탕진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짐작해본다. 이런 사람들, 이렇게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짜도 좋아할 것 같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자기돈은 한 푼도 내놓지 않고 공짜로 비석을 세워주길 바라는 그 심뽀가 대단해 보인다. ‘3가지가 없다’는 인터넷상 유행어가 있다.
‘비밀이 없다. 정답이 없다. 공짜가 없다’이다. 이 세 문장의 각각 앞에 ‘인생에는’이라는 4자가 선행한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이렇게 쓰면 된다. ‘공짜가 있었다면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풍자다. 시비를 세우려고 아둥바둥대는 시인은 이 아포리즘에 움찔하면서도 외면한다. 왜냐? 시인은 특별해서 저 유행어 마지막 줄 ‘공짜가 없다’를 ‘공짜가 있다’로 읽는다. 이 앞에 들어갈 선행구는 ‘시인에게’, 이 네 자이다.
시비 속 시는 연년세세 썩지 않는다. 돌에 새기는 의미가 그렇다. 부패하지 않게 자자손손 읽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 이런 시인이 살고갔다. 그러니 나를 영원히 기억하고 추념해다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의 못된 것까지 들춰내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수많은 단어들이 그 대열에 끼려고 대기 중이다. 방랑, 서정, 참여, 풍자, 나아가 호반 등이 시인이라는 명사 앞에 들어가 수식한다. 방랑시인, 김삿갓! 하지만 우리네 이웃들은 이제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무엇을 보면 그 앞에서 끝장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음의 낱말을 대기시켜 놓고 기다린다. 무능한, 실력없는, 노련한, 짠돌이, 공짜좋아하는 등의 능욕적 언어가 짝을 찾아 줄을 선다.
독재자들은 자신이 사후 시체를 방부처리해 영원히 보존하도록 한다. 시비도 방부처리한 시체와 오십보 백보다. 돌에다 글을 새겨 박아놓을 정도로 연년세세 영원히 썩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 갸륵한 마음.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우주의 진리는 생자필멸이고 회자정리다. 자신의 업적, 시를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봤던가? 하찮은 티끌과 같은 인간의 삶인데, 좀 읽었다고, 썼다고 생전 자랑하면 될 터인데, 이렇게 영원불멸로 가려고 해야 쓰나? 앞으로 젊은 시인이 나이 지긋하면 “나도 비석을 세우겠다. 예산을 주고 장소도 내놔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이지만 골치 벌써 ‘띵’하다.
시인의 시비는 자신의 시를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허영심을 먹이로 자라난 잡초와 같다.
시의 터전에 생겨난 잡초가 시 몇줄로 허세가 바짝 든 시인과 공생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허세와 허영심을 가장 경계 했다. 대신 자긍심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자만심이 아니다.자신을 자신(自信)하는 마음, 자긍심을 내적 확신의 결과로 말한다. 시인의 시비도 시인의 자긍심이 있다면 굳이 세울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자긍심을 갖는 시인의 시는 사람들에게 그 시를 읽는 기쁨과 행복의 길을 가르쳐 준다.
“자긍심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기껏해야 자긍심이 있는 체 할 뿐이며, 억지로 떠맡은 역할이 다 그렇듯 결국 분수에 맞지 않는다. 자신이 압도적인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한 흔들림 없는 내적 확신만이 실제로 자긍심을 품게 해준다. (...) 자긍심의 고약한 적은, 말하자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른 사람의 갈채를 받으려고 애쓰는 허영심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홍성광옮김/ 을유문화사(2023) 64쪽>
자긍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시비 없는 시인을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것으로 만 채워진 그의 인생을 그의 시에서 필자는 읽어낸다. 풍찬노숙을 마다 않았던 시인의 시에서 우리가 흔히 사는 삶의 꼿꼿함과 아름다움까지, 우리의 울림 속으로 내려와 함께 가라앉으려는 시어에 심취하는 것은 더 없는 기쁨이다.
좋은 시를 쓰고 그 시를 우리가 읽을 때에 시인의 시비는 이미 마음속에 우뚝 세워져 있다. 돌에다 새긴 시는 영원할 것 같지만 비와 바람에 풍화돼 마모되고 부식된다. 좋은 시는 각문(刻文)을 원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고귀한 시는 ‘신들의 보호’아래 인간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음송될 것이기에.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