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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무 위로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침저녁으로 계절의 시계는 재채기를 내뱉으며 소리 없이 걸어가고 있다. 하늘빛이 시리게 짙푸르다. 가을 하늘이 이처럼 파란색이었을까. 흰색 물감을 떨어뜨려 퍼트린 듯한 새털구름. 수채화를 그린 것처럼 근사하다.
가을 햇살은 나를 수런수런 분주하게 한다. 텃밭의 열매들을 걷는 손길이 바쁘다. 고구마도 캐야 하고 호박과 가지, 고춧잎, 토란대도 말려야 한다. 가을걷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가을이 오면 어머니는 햇빛 좋은 날에 호박과 가지와 고춧잎, 토란대를 말렸다. 호박은 껍질을 벗겨 얇게 썰고 가지는 어슷하게 썰어 채반에 널었다. 고춧잎은 살짝 삶고 토란대는 껍질을 벗겨 햇볕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겨울 곳간을 풍요롭게 채웠다.
내 안으로 불쑥 찬 기운이 들어선다. 날빛에 가만히 눈을 던져본다. 마른 풀 가득한 텃밭 구석에 하늘을 향한 연잎 같이 넓은 토란잎이 보인다. 미세먼지 흩뿌려진 잎에 궁글어 빚어낸 이슬, 너무 맑고 눈부셔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무욕의 덩어리. 토란잎이 간질간질 흔들어대면 흔적도 없이 자취는 사라진다. 어느 시인이 읊은 것처럼 “물방울을 털어내기 전에,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는가.” 천진난만한 사랑이 따로 없다.
이른 봄 텃밭 한 구석 자리에 심은 토란은 이슬방울만으로도 내게 충분한 환희다.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있으면 하나하나가 신비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감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미끈거리고 끈적한 뮤신 점액질을 품은 토란. 지금은 호불호가 엇갈린 별미 재료가 되어버렸지만 예전에는 맛과 영양이 좋은 천상의 음식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시대 한양 근교에 대규모 토란 밭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좋은 식재료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소동파는 “향기는 용연(龍涎) 같은데 맛은 우유와 닮았고…, 함부로 동파의 옥삼갱과 비교하지 마라.”라는 시를 쓰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하니, 소동파 집안에서 끓였다는 옥삼갱의 토란국, 얼마나 맛이 있고 좋아했으면 이랬을까.
햇살은 한여름보다 따갑고 그늘에 있으면 까슬까슬하도록 서늘한 날, 마당에서 껍질 벗긴 토란대를 보노라면 어머니의 삶이 느껴진다. 마당에서 햇빛 냄새와 바람 냄새를 흠뻑 들이키며 꼬들꼬들 말라가는 것들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토란대. 마당의 풍경을 손자 보듯 앞으로 보고, 옆으로 보고, 뒤돌아보고 그러다가 다시 훔쳐본다. 어린 시절을 불러오며 어머니의 냄새가 풍기는 듯하다.
토란이 손맛으로 내게 온다. 어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물에 삶아 아린 맛을 우려낸 토란대를 들깨가루를 넣고 볶아 나물을 만들었다. 들깨가루 향이 어우러진 맛이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아릿하면서 비릿한 맛은 들깨향으로 버무려지면 나를 부엌에 붙잡아놓곤 했다. 토란대를 넣고 끓인 탕의 맛은 어떠한가. 육개장에 빠질 수 없는 토란대.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를 넣고 푹 끓이면 그 맛의 식감은 대비되었다. 배지근하면서도 깊은 쓴맛은 인생의 맛이었다. 그 심오한 쓴맛을 어머니의 서럽고 힘겹게 살아오신 그 맛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주름진 맛이 밀물져 온다.
‘땅에서 나는 알처럼 생겼다’는 토란. 요리를 하려면 다루기가 쉽지 않다. 토란은 세상의 이치처럼 만만치 않은 식재료다. 생토란은 뿌리식물로써 독을 가지고 있다. 잘못 다루면 피부가 화끈거리고 가려워서 밤잠을 설칠 수도 있다. 껍질을 벗길 때는 쌀뜨물에 담갔다가 소금이나 베이킹 소다를 묻히거나 장갑을 끼고 만져야 가려운 증상을 막을 수 있다.
세시음식으로 추석 차례상에 반드시 올렸던 토란국. 다시마 육수에 무와 쇠고기와 살은 토란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해 끓인 국은 주로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다. 이런 토란국을 나는 처음에는 미끌미끌 넘어가는 토란 특유의 감촉이 좋아 젓가락질을 해본다. 그렇지만 입에 들어가면 그저 그렇고 해서 멀리하곤 했다. 나이가 들다보니 입맛에도 미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껴안게 된다. 이젠 입맛도 바뀌고 토란 맛에 이끌린다. 익힌 토란의 텁텁하고 밋밋한 맛이 엔돌핀으로 다가와 토란 요리를 하게 된다.
토란 몇 뿌리를 캐서 저녁 밥상에 토란 조림을 올려본다. 뚝딱뚝딱 도마 위의 칼질소리,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손이 빨라진다. 토란을 한입 크기로 썰고 냄비에 넣는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며 맛있는 냄새가 올라오면 꽈리고추와 통마늘을 곁들여 간장, 설탕을 넣고 졸인다. 하루의 힘들었던 생각은 열기 속으로 사라지고 완성된 음식을 접시에 놓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어찌 이렇게도 먹음직스러울까, 나는 오늘의 셰프?, 아니면 ?’ 미소를 지으며 혼자 생각에 젖는다. 음식은 관심과 정성이다. 그게 가족 사랑이 아니던가. 자박한 국물과 함께 떠먹으니 깊은 감칠맛이 난다. 행복한 토란의 시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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