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시간은 빠르게 소진한다. 소녀적 보다 빛바랜 센치멘탈을 동반하고 가을이 당도했다. 어디로든 훌쩍 떠나야만 하는 건 가을의 불문율처럼 심상을 흔든다. 오름, 억새, 바람 이 모두가 가을의 전령이다. 기웃거리는 일 없이 최상의 방편으로 오름을 콕 찍으면 패키지로 떠안을 수 있다.
끌리는 대상에 오롯이 몰입하고 싶은 날은 혼자가 편하다. 배려하고, 조율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마저도 아껴서, 충만한 시간을 얻기 위하여. 초행길은 아니지만, 예전엔 일행들이 함께였고, 운전은 믿기만 하라고 쐐기를 박는 이의 뒷좌석에 앉아 하늘만 보며 멍때리다 금세 도착했었다. 공간지각 능력이 낮아 길이나 방향 감각이 떨어져 헤매는 길치도 일종의 발달장애라는 사실, 길치인 나를 못 믿는다.
네이버 길 찾기를 클릭하고 도착지는 용눈이오름이라고 적는다. 신뢰감이 드는 여인의 목소리로 안내를 받으며 가는 길은 소요 시간 30분을 넘기고 도착했다. 새로운 경로로 안내하겠다는 멘트가 들려올 때마다, 믿는 구석이 있고, 밝은 대낮이니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디지털 세상이 삶을 교란하는 뉴스를 접할 때면 거부 반응이었다. 채널 넘버를 순식간에 바꾸고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다. 디지털의 역기능을 생각하면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에 흠뻑 동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내비게이션에 찬사를 보낸다.
용이 누워있는 형상인 용눈이오름은 용이 들어간 용호상박(龍虎相搏), 용안(龍顔)처럼 넘보지 못할 뜻을 생각하면 감히 범접하기엔 머릿발이라도 바짝 설 것만 같은 상상을 하지 않겠는가. 겪어 보지 않고는 판단하지 말라 하였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봐야 하는 저자세는 아니어서, 스틱에 의지하지 않아도 버텨줄 두 다리를 믿는다. 일몰을 영접하는 시간은 반나절이나 남았으니, 인적은 한산하다. 예전엔 정상을 향하여 마구잡이로 직진했었는데, 허물어지는 것들을 소생시키는 건 반색할 일이다. 오름의 심장부를 관통하지 말라고, 우회해서 걷도록 바닥에 야자 매트를 깔아놓고 이곳만 밟고 가시라고 한다.
오르는 길은 오름보다 먼저 하늘에 눈길이 닿는다. 봄 하늘, 여름 하늘이라 부른 적 없고, 지금은 고유명사처럼 가을하늘이 아닌가. 저 홀로 높아지기엔 쓸쓸했을까, 뭉게구름 두루뭉술 군락을 이루고 그 사이로 처연하다. 함께하는 인연들이 있어 외로움도 덜하다고 하늘은 말하고 싶은 거다. 사람도 너무 맑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 하지 않은가. 오름 목덜미까지 내려온 구름의 낙하로 심리적인 거리마저도 가까워진 듯, 저들도 가을을 타나 보다.
탐방로 서너 군데에는 나무로 짜인 통로를 미로찾기 하듯 지나야 한다. 한 사람만이 통과하도록 얽어 놓은 그 지점에서는 주춤 느린 보폭이 된다. 나무토막을 가로로 세로로 짜놓은 틀에서 “ㄹ”과 “ㅐ” 자음과 모음을 읽고 있다. 언젠가 한글의 예술화라는 글을 읽은 후로는 어떤 설치품에서 한글의 형태를 찾게 된다. 미국인 애런 벨은 자기 회사 로고를 한글 자음과 모음을 따서 디자인했다. 한글 서체 디자이너라는 자격으로 일본의 디자인 워크숍에서 한글 서체 강의를 했다는데, 이방인의 영감으로 양복에 삿갓 쓰고 비유는 낡은 문장이 되었나 싶다.
태어나면서 거저 주어진 모국어에 대한 무관심이 이곳에서 다시 염두에 둔다.
하산하던 초로의 여인이 핸드폰 카메라를 누르다 말고 “너무 좋아요!” 외친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기에, 넘치는 행복을 공짜로 쏟아붓는 여인의 뒷모습이 누운 오름의 끝자락까지 눌어붙는다.
정상으로 다다를수록 바람에 대항하지 않은 억새가 나부낀다. 이 가을 불멸의 연인쯤은 될 터인즉, 아직은 백발이 아닌, 갓 피어난 억새가 불그스레 상기되었다.
신세계를 폐부 안으로 끌어들이며 깊이 심호흡을 한다. 속박했던 아집을 허공으로 날려 버릴 수 있다. 오름은 벌거벗겨진 등판을 선뜻 내놓고 나를 딛고 마냥 오르라 한다. 아직, 관상동맥 우회술 수술을 받은 환자처럼 철책을 박아 놓아 상처투성이 오름이다. 왕년에 잘 나갔는데, 말하는 건 추레한 자신을 포장하는 방편인 걸, 그건 슬픔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돌아가서 씁쓰레하기에 오래 아프다.
돌아서는 길, 구름 떠난 하늘이 왜 이다지도 시릴까.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