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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 바닷가 하늘에 흰 보름달이 걸려 있다. 달빛 물결이 갯바위에 속삭이듯 부딪히며 철썩거린다. 깊은 바다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파도만이 일렁이며 훨레훨레 춤을 춘다.
바다는 시린 듯 밤물결을 헤치며 가을바람을 끌고 온다. 끈적끈적하다. 방파제의 뜨거웠던 호흡은 가라앉고 낚시꾼들은 바다의 울음 속에 잠긴다. 달빛은 바다의 물결을 은밀하게 애무하듯 살짝살짝 스치며 밀려났다 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바다 윤슬로 눈이 부시다..
고즈넉한 마을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풍경이다. 달과 별이 너울거리는 밤하늘은 파도처럼 소용돌이무늬를 수놓은 듯하다. 처절한 몸부림을 이해해야만 했는가. 물기 젖은 바다 바람으로 달빛 술잔에 네온사인이 출렁거린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바닷가를 느리게 걷는다. 달빛으로 온몸을 적신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피부에 스며들며 나의 애틋한 기억의 그림자 속으로 감겨든다. 짠맛으로 절여진 발자국에 그리움이 묻어있다.
11월의 보름달빛 바다는 서글프다. 그래서 서리달이라 했는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신 어머니, 배추 씨앗처럼 못다 한 수많은 말들, 옷깃에 기워진 실타래를 바다 위에 풀어놓아 본다. 보고 듣는 이 없어도 가슴에 담아 둔 울음을 뱃고동처럼 마음껏 뱉어내고 싶다. 아픔만큼 다가오는 뉘우침이 커서 더 서럽고 슬프다.
열아홉 살 되던 해, 정월 보름날. 아버지는 직장에 출근했다가 뇌출혈로 한 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이승을 훌쩍 떠나셨다. 천지개벽 요동치듯 모든 것이 하얀 포말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술빚과 어린 세 자녀만 남겨두고 떠난 남편을 원망할 틈도 없었다. 절규하며 뭍으로 올라서려 몸부림을 치며 장사에 도전했지만 빛을 잃은 달처럼 시나브로 사위어가며 스러지고 말았다. 배짱과 요령이 없어 믿었던 이웃한테 속기만 했다. 그때 받은 상처와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어머니는 고단함을 등에 지고 이웃집 밭일을 나가셨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유채 수확을 하다가 탈진하기도 하고,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에는 밀감 따다 손이 얼기도 했다. 그리고 밤마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 끙끙 앓았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퍽퍽 소리가 났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귀찮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고된 삶을 읽어드리지 못한 나의 잘못된 생각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울부짖지도 않고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다. 아무리 한恨의 서리가 맺힐지라도 하늘 타령하지도 않았다. 자식들을 보며 삶의 바다에서 물숨을 참아가며 숨비소리를 뱉곤 했다. 그러다가 일감이 있는 낮에는 허리와 다리의 아픔도 이상하리만큼 사라졌다. 새벽마다 조왕할머니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촛불이 어머니 허리와 다리 아픔을 물리쳐 준 것인가, 살아야 한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인가? 신기했다.
찬바람에 옷깃이 흔들린다. 초록으로 물든 명도암에 살다가 달빛 바다를 보니 맛을 잃어버린 사람이 된 듯하다. 모래밭에는 맨발 걷기 하는 사람들이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며 왔다 갔다 한다. 바다에 내리는 11월의 둥근 서리달빛을 바라본다. 둥근 달빛이 바다 위에 누워 세상을 밝힌다. 어머니는 정월 대보름날엔 찹쌀을 씻어 그릇에 담고 시루에 식구 수대로 밥을 지었다. 달이 뜨는 곳을 향해 그 밥을 올려 절을 하곤 했다. 가족의 건강과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작은 소망이자 믿음이었다. 서리달에 기대에 살았던 어머니의 기도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아련하고 목이 메어 울컥해진다.
나는 매일 다른 변화를 주는 달빛을 좋아한다. 서쪽 하늘에 잠깐 나타났다가 숨어 버리는 둥근 눈썹 모양의 초승달, 때가 되면 늑대를 울게 하는 보름달이 되겠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다. 그래서 부지런한 며느리만이 볼 수 있다고 했는가. 그믐달은 사위어가는 가을 인생 같아 가슴이 시리다. 새벽잠이 많은 이는 보기 어렵다.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온밤을 누리니 더욱 좋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비어있지 않고 둥글둥글하다. 모나거나 야박하지도 않고 어우렁더우렁 편안하다. 나는 그래서 나를 닮은 보름달을 좋아한다.
이제 며칠 없으면 어머니 기일이다. 기쁨보다는 아픔이 더 많았던 어머니, 잔물결 되어 흐른다. 어느 소설가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듯이 나도 다음 생에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 보듬고 쓰다듬어주고 싶다. 이생에서 다 못다 한 따스한 이야기, 11월 서리달빛 아래. 파도 소리의 탁음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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