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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악에서
정영자/수필가  |  jjeju@jeju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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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11.13  12: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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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은 두모악 갤러리. 잔혹했던 여름의 잔영이 드리워진 뜰에도 가을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가을빛을 닮은 사진작가, 때때로 그의 작품이 나를 부른다.
  
 인적 드문 어둑한 전시실, 빛으로 빚은 오름 앞에 섰다. 사각의 틀 안에 누워있는 오름은 바람 소리를 가두고 고요하다. 정적이 흐르는 전시실에서 시간을 잊은 채 작품을 보고 있으면 들판의 거친 바람이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카메라를 짊어지고 오르는 한 남자를 떠올린다. 그 하얀 겨울날에도 들판의 억새를 헤치며 휘적휘적 오르고 있었겠지. 들판의 바람을 등에 업고 엎드린 채로 배고픔마저도 잊고 찰나의 순간을 응시하던 한 남자가 보인다. 사각 프레임에 담긴 오름 앞에서 그의 영혼을 느끼며 묵묵히 서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 아득한 심연을 흔들어 대는 이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유려한 능선이 겹치며 흐르는 용눈이 오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고향을 떠나서 제주의 빛과 바람, 오름과 억새의 은빛 영혼에 홀려 제주에 뿌리를 내린 김영갑. 밥 대신 필름을 사고,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배고픔을 달래며, 제주의 바람을 안고 떠돌아다니며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가 찾고자 하던 그 무엇을 찾았을까. 그가 남긴 산문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으며 순정 가득한 글에 매료되었다. 순수함은 곧 진실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오르가슴은 삽시간의 황홀로 찾아왔다는 그의 글에서 그가 남긴 작품은 영혼으로 구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카메라 하나 들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때였다. 타인의 눈이 바라보는 나보다 내 안의 상황이 더 답답한 것들에서 떠나고 싶었을 때, 카메라는 일상탈출의 통로가 되었다. 무엇이라는 목표설정도 없이 무작정 다닐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허락하며 정처 없이 쏘다녔다.
  
 들판을 누비고 오름을 오르며, 마을 안 골목길을 걷다가 이끼 낀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투박한 소리에 귀 기울이며 셔터를 눌렀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람이 그리웠던 시절이었다. 의지하고 싶었던 건 사람의 품이었을 진데 내겐 그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용눈이 오름에 올라 사진을 찍다가 “삶의 끝자락에 내몰린 나는 그렇게 하늘만을 믿고 나에게 허락된 하루를 감사하며 신명을 다해 오늘을 즐긴다.”라는 그의 이 한마디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의 갤러리에서 보았던 오름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셔터를 누르던 손을 멈추고 일어나 앉았다. 
 
 나는 왜 사진을 찍고 있을까. 무얼 찾으려고 이러고 다니는 것일까. 이 사진을 찍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셔터를 누르면서 한 번도 물음표를 달지 않았던 자신이 보였다. 과정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순간순간 희열을 느끼는 자신과 만나면서 나의 존재를 일깨우고 싶었을까. 내 모습을 잃지 않고 내 것으로 지키고 싶은 그 욕망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것인가. 
 
 김영갑은 사진에 미친 사람이었다. 제주의 자연풍광에 미치고 유려한 오름 능선에 엎드려 한순간의 황홀경을 맞이하기 위해 미쳐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가 사진을 찍으며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던 것처럼, 나도 자연의 품에서 사진을 찍으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숲속에서, 거친 물살이 바위를 치는 바닷가에서, 오름 능선 사이 그 아늑한 품 안에서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연인을 애무하듯 온 섬을 헤집고 다니며 이슬과 안개, 어둠과 폭풍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영혼을 나누고 순간의 절정을 필름 속에 담아내던 그였다.
  
 “이십여 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이어도다. 제주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 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한다.” 그의 책 머리글에서 이 글을 보고 나는 그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으나, 제 목숨보다 제주가 소중했던 그의 삶은 이미 그가 만난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 만에 다시 온 두모악. 뜨락에 나무들은 눈에 띄게 자라나 운치를 더하는데, 이 공간을 메우던 사람들의 온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쓸쓸하기만 하다. 가을빛 번지는 뜨락에 서서 내 마음은 구르는 낙엽과도 같이 서성이고, 바람 한 줄기 노을 지는 서녘 담 위를 무심히 넘는다. 

 바람의 길을 따라 떠나간 그의 빈자리가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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