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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나 보다. 11월 초까지 늘어진 여름의 기세를 꺾어버리는 비가 강풍을 동반하고 후려친다. 수명이 짧은 가을이 하직하고 겨울을 동반한 하늘이 웅크리고 있다. 예년 같으면 만추를 묵상하던 낙엽이 경지에 다다라, 자유로이 구르다 화장터의 한 줌 재가 되어 부엽토로 환생하건만, 잎새들이 초록인 채로 서둘러지고 말았다. 빗물을 짊어진 낙엽은 온갖 무게로 짓눌려 미동도 없다.
비 떠난 뒤, 하늘은 심정이 어긋났을까.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소되던 무료함은 중증으로 치닫는다. 소통할 대상을 갈구하는 마음이 꿈틀대는 건, 내 감정선을 채우려 예약해 둔 일이 있어서다. 그건 대상을 바라볼 때 온전히 몰입하여 묻고 대답할 수 있다. 일방적이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밀하게 속내를 교감할 수 있다. 포기하지 못하던 일들을 미루다 한 해가 떠난다고 기별하는 입동 즈음에 도지는 지병, 쓸쓸함에 대하여 명약을 처방 내린다. 훌쩍 떠나라.
그곳은 지금쯤이면 북적대던 사람들의 들뜬 시간이 물러가고 주차장엔 두서너 대의 차만이 원 없이 점령하고 있을지 모른다. 차들 사이로 비집고 주차하려면 전진, 후진을 반복해야만 하는 기계치의 비애도 아랑곳하지 않아도 된다.
성곽에 둘러싸인 그곳은 입동의 찬 바람을 껴안고 아늑하다.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이나 자동차의 경적도 까마득히 잊힐 정도로 흐르는 시간마저 칩거 중이다. 화려한 옷차림이나 진한 립스틱을 칠한 위장된 모습은 훌훌 거둬내는 게 자연스럽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하지만, 문득 떠올리면 존재감이 특별한 곳이다. 예스러움은 빛나지 않지만, 눈부터 마음에 이르기까지 빛을 밝혀 주고 있다. 마치 구원으로 인도하는 신앙의 신비처럼 시나브로 스며든다.
울담 너머로 보이는 초가집은 ㅇㅇㅇ고택이라고, 돌판에 새겨진 함자가 눈을 번뜩인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 운명처럼 다가와 거부할 수 없었다고, 제 몫을 다하는 파수병으로 서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어찌하여 6학년 선배들의 담임 선생님 함자나 모습이 명료하게 뇌리에 새겨졌을까. 설핏 백 년쯤 되었을지 더듬어 보지만, 아직 백 년에 닿지 못한 세월을 돌아서 인걸은 간데없고 고택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영원을 살고 있다. 시절 인연이 도래한 때가 지금일까. 큰 것을 탐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소박한 선비로 사셨던 선생님을 뵙는 것처럼 고택은 어질고 고결한 풍모다. 이문간(대문)을 들어서면 안거리, 밖거리 초가는 새(띠) 한 오라기나 매어 놓은 집줄이 흘러내려 바람에 휘적대는 일 없이 단발머리 소녀처럼 단정한 품새다. 집줄을 꼬아서 칭칭 매어 놓은 초가지붕은 바람의 기세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제주 사람들의 의지를 피력하는 듯하다.
초가지붕을 이는 전날, 조상들은 서녘 하늘로 촉을 세웠다. 저녁노을이 구름에 숨어버리면 마음이 먼저 잠겨버리고, 샛바람인지 하늬바람인지 가늠하며 날씨를 예감했다. 바람이 거친 날이라면 행여 지붕에 새(띠)를 펼칠 수 있었으랴.
숭숭 뚫려 무너진 억장은 차라리 체념하면 초연할 수 있었을까. 돌담길의 숭고함에 바람도 직설적으로 내뱉지 못하고 동반자가 되어 냉랭한 기류를 삼키고 있다. 휘적휘적 유람하던 걸음은 이대로 멈추지 않고 무념무상으로 걷고 싶은데, 수령이 600여 년 팽나무 앞에서 툭 멈췄다. 연약한 외피는 견디고 버티다 차라리 동물의 거죽이라면 순응할 수 있으련만, 신음조차 내지 않고 함구하고 서 있다. 빈곤한 현실이 근심이어서, 웃풍 심한 슬레이트집 냉골 방의 전기장판 온도 높이지 못하고 움츠리고 계셨던 노모가 떠올라 얼른 돌아서고 말았다. 어머니 가시고 십여 년, 이제야 전기장판 고온으로 올려 드리는 생각 속에 불효자는 흐려지는 두 눈을 적시고 채 뜨지 못하고 있다.
삶의 기막힌 묘법이 있어 환골탈태와 신분 상승을 꿈꿨으랴. 채우지 못 한 자의 애환을 묻어 버릴 수 있을지 후미진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다 부질없다고 하는 말은 이론일 뿐, 이루고 도달한 자의 여유는 아닐까. 비바람에 지워진 공덕비의 행렬과 조우를 한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비석들을 훑어본다. 눈길이 멈춘 건 풍문으로 들었던 마을 유지의 이름이다. 나 누구에게 이름 석 자만이라도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을까.
입동 즈음 어스름께, 성읍마을은 오메기술 한 잔으로 거나하게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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