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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시동을 건다. 여느 때처럼 블랙박스에선 포맷이 필요하다고 안내한다. 매번 차 안에 퍼지는 안내자의 목소리가 여간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번거로워서 블랙박스를 떼어내고 싶어도 지나간 자질구레한 접촉 사고 등이 떠올라 움직이던 손을 멈춘다.
문제가 뭘까. 내비게이션이 가르키는 시간과 블랙박스의 시간이 십사 분이 차이 난다. 시간을 맞추어도 다니다 보면 다시 시간 차가 벌어지는데 이런 데는 초보자여서 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그냥 두어도 무슨 상관이랴마는 꼬리를 무는 상상은 늘 불안과 걱정을 만들어 낸다. 혹여 사고라도 나거나, 블랙박스를 검색해 봐야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시간 차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제대로 증명 안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어느덧 나의 차는 서비스업체의 문으로 들어섰다.
수리기사는 블랙박스를 포맷시키고 나서 “어긋난 시간을 맞추려면 GPS를 장착해야 한다”라고 했다. 돌려 들으면 시간은 계속해서 어긋날 것이니 그대로 감수하라는 뜻이 아닌가. 그냥 미소만 짓고 돌아선다.
어쩌면 내 자동차의 블랙박스와 같이 정확하지 않은 시간을 껴안고 나는 이렇게 궁상을 떨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하루하루 덜어내는 시간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움직이며 건너왔을 오늘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라는 시간의 속도에는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은은하거나 부산스러웠거나 때론 사랑이었거나 미움이었거나. 막연히 기다리며 어느 정도의 슬픔과 외로움을 당연시하며 그 시간을 잊고자 했던 지난날이 선명하다.
불빛을 응시하다 눈을 감으면 그 빛이 오래도록 남아있듯 좋은 감정은 마음에 점 하나를 찍는다. 하지만 감정을 거슬린 일은 심연에 가라앉았다가 어느 순간 치고 올라와 괴롭힌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나무라 보지만, 친구라던 이에게서 받은 상처는 아물지가 않는다. 그래, 살면서 어긋난 시간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었을까. 내 삶 속 한땀 한땀 놓던 수(繡)가 그 ‘어긋난 시간’의 편린으로 뒤죽박죽이 된 듯하다.
이미지 하나가 내 기억을 휘감으며 떠오른다.
미동도 없는 맑은 바다와 사막에 죽은 올리브나무와 감은 눈을 연상시키는 물체와 각진 모서리. 그 위에 시계가 축축 늘어진 채 있고 붉은 회중시계 위에는 개미들이 우글거린다.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상황 설정이다. 꿈에서나 볼듯한 그림은 내 감정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흐르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나의 시간이 상상되는 까닭일까. 우리의 삶을 측정한 시간을 조롱하듯 흐느적거리는 시간의 흐름을 소름 돋게 보여준다. 사람마다 인식의 차이에 따라 시간의 느낌은 다르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을 듯싶다.
마흔이 넘은 딸아이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 섭섭했던 기억을 가끔 이야기한다.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거나, 오빠에게만 더 신경을 썼다거나 하는 것들이 자기식으로 각색되어 부풀려져서 자라고 있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소설을 쓴다며 핀잔을 주곤 했지만,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었던 어린 딸의 마음을 읽곤 한다. 딸의 성장기에 곁에서 보듬어 주지 못한 엄마의 뒤틀린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기억이다.
맞출 수 없다면 블랙박스의 시간도 그냥 두자. 기사에게 나중에 들르겠다며 차를 몰고 나오는데 가로수 나뭇잎이 차 위로 툭 툭 떨어진다. 자연의 시계처럼 오차 없는 알림이 있을까. 봄부터 겨울까지 살아 낸 저 잎은 이제 다시 흙으로 돌아가겠지. 쓸쓸히 떨어지는 나뭇잎에서 시간을 읽는다.
날짜를 재촉하듯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오늘 밤에는 유난히 또렷이 들린다. 밤이 깊어 갈수록 맑아지는 눈동자가 초침을 따라간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려는 듯이. 시계는 시간표에 불과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순간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특별한 시간을 정확히 알려준다.
올해가 지나면 일흔을 넘는다. 올봄 정형외과에서 ‘이제 고희잖아요’라며 경고등을 켜줄 때 만 해도 속으론 ‘나이는 그냥 알림 같은 것’이라 웃고 말았는데, 어긋난 시간으로 인해 내 나이를 의식한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자연스레 오고 사라져 갈 날들이 오직 투명한 시간으로 오기를 꿈꿀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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