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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묵, 또 먹고 싶다
오인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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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1.01  17: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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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은 잿빛 허공에서 꽃잎 날리듯 흩날리다가 길을 덮는다. 어느새 마을을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낯선 거리처럼 일상의 풍경을 바뀌어 놓는다. 마을 어귀의 흰 눈이 쌓인 들녘은 노루 발자국만 오롯이 오목판화를 새긴 듯 빛난다. 
 
 화단의 돌담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시루떡을 얹은 듯하다. 광나무 푸른 잎 사이로 우르르 눈꽃이 피었다. 간밤을 잃어버린 텃밭은 거친 숨을 내쉬며 추억의 안단테를 불러온다. 숨을 곳이 없어진 새들만이 빈 가지 사이를 날아오르며 노래를 하고 있다. 

 
 얼어붙은 대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다른 몸짓으로 엉켜서 운다. 내 마음도 그리움의 눈이 내리며 어릴 적 먹던 청묵으로 녹는다. 함박눈이 밤새 쏟아지는 이런 날이면 청묵을 만드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윽한 풍경이다.  
 
 어머니는 정갈한 부엌에서 껍질 벗긴 메밀쌀에 물을 붓고 담그신다. 불린 메밀쌀을 삼베 주머니에 넣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빨래하듯 주무른다.
 
 나는 그 옆에 바투 앉아 어머니의 손을 들여다본다. 눈발이 몰아치는 휘모리장단이라고나 할까. 손가락이 신명난 듯 속도가 빨라진다. 손목과 팔에 힘이 들어가며 날선 핏줄이 서릿발처럼 일어난다. 삼베주머니 숨구멍에서 뽀얀 우유 같은 전분 앙금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나온다. 날실과 씨실로 만난 슬픔과 기쁨의 순간들이 미끄러지며 부딪힌다.
 
 앙금이 모아지면 냄비에 붓고 소금 한 꼬집 넣어 눌지 않도록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인다.사무치는 외로움도 잊고 한 방향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젖는다. 걸쭉해지면 참기름을 조금 넣어 휙 저은 후 납작한 틀에 부어 식혀 굳힌다. 풍만한 여인의 뽀얀 살결처럼 탄력있고 매끄럽다.  
 
 냄비뚜껑 여는 소리가 들린다. 함박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이 소리를 들으면 얼굴빛이 환해지곤 했다. 백옥처럼 맑은 빛깔의 탱글탱글한 청묵. 먼저 눈으로 스캔한다. 그리고선 코를 박고 그 냄새를 들이마신다. 청량하지도 않고 밋밋하면서 고요한 맛이다.
 
 어머니는 청묵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르다 내게 한쪽 귀퉁이를 잘라 준다. 입안에 넣으니 군침을 자극하며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담백하고 깊은 속살의 여운이 남는다.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묵보다 훨씬 말랑말랑하다. 송송 썬 파, 참기름, 마늘, 깨로 만든 양념간장을 얹으면 젓가락 사이로 입맛을 부르는 향이 가득히 퍼진다. 고소한 뒷맛으로 남는다.
 
 청묵은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고 마지막으로 드셨던 음식이다. 정월 보름날 아침 밥상에는 흰밥에 미역국과 옥돔구이, 여러 가지 나물과 청묵이 차려졌다. 그날따라 청묵 빛깔이 백자기처럼 너무 고왔다. 아버지는 청묵 한 조각을 입 안에 넣고는 몸의 감각으로 맛을 음미한다. 발우 공양하는 스님처럼 아주 천천히. 남긴 음식도 없이 접시에 담은 일곱 쪽의 청묵을 다 드셨다. 그렇게 대보름 밥상을 잘 받아 드시고 출근한 후 이별의 말씀도 없이 이승을 훌쩍 떠나버렸다. 그 후 청묵은 밥상에서 사라지고 쓸쓸한 음식으로 그리움만 남겼다. 
 
 청묵 쑤는 날, 아버지는 이웃 집 태윤이 삼춘과 겸상을 하고 살아가는 정을 나누기도 했다. 청묵이 있는 밥상 앞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버지는 늘 담백한 청묵 맛을 즐겼다. 맛의 묘미를 아셨을까. 단맛도 짠맛도 쓴맛도 신맛도 없는 맛, 그냥 무(無) 맛이다. 어쩌면 맛에서 느껴지지 않는 외로움을 씹으며 고단함을 달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청묵 맛이 그리워 오일장에서 메밀쌀을 사서 만들어보았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그 맛이 아니었다. 정성이 모자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만드는 조리 과정이 잘못된 것일까. 어머니 생전에 배워 두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이미 속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눈발이 또 날린다. 한 장 남은 달력에도 눈이 내린다. 이렇게 흰 눈이 내리는 날이면 부모님과 함께했던 음식 냄새로 가슴이 젖는다. 막걸리 한잔 걸치면서 청묵을 즐겨 드시던 아버지. 오늘따라 시린 눈물 속 그 음식이 울컥울컥, 아슴아슴 내게로 온다. 그 청묵, 또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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