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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눈이 내렸다. 아직은 겨울 초입인데. 온 천지가 휴면에 든 시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라고 택일하셨나, 은밀하게 방문하셨다. 새벽 한기에 선뜻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는데 젖히지도 않은 커튼이 희부여니 심상치 않았다. 신이 연약한 여자에게 특별히 내린 하사품이라는 촉은 오차가 없다.
축하 꽃다발을 받은 후배 수필가가 그 꽃다발을 내게 기꺼이 안겨주던 날, 건조한 가슴에 한바탕 꽃향기로 흥건하였다. 거저 준 것이니 은혜를 갚지 않아도 고마운 마음이면 충분하다. 부담 없이 즐길 일이다. 그날처럼 낭보다. 더 바람 없이 지금만큼만 최소한의 안위로 만족했는데, 무료했을까. 설렌다. 아직 마음만은 젊다.
‘닥터 지바고’ 영화를 본 스무 살쯤에는 시베리아의 설원과 주제 음악 ‘라라의 테마’가 눈 덮인 영화의 장면처럼 뇌리를 온통 덮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이 일어 우랄산맥을 향해 달리던 피난 열차의 기적 소리와 그들이 절망하던 눈빛, 꽁꽁 얼어 버린 유리창을 깨고 떠나는 라라를 바라보던 지바고의 불그스레 충혈된 눈에 고인 그렁그렁한 눈물, 열차의 차창을 하염없이 스치는 첩첩이 쌓인 눈. 영화의 기억들은 스무 살이 지나도 오래도록 문득문득 떠올라 애수에 잠기게 한다.
밤새 바람과 합세한 눈이 퍼부어 댄 시간이 지나고 세상은 정적이다. 마을 정경은 눈의 포로가 되어 밤이 범접하지 못할 세상이다. 등불을 밝히지 않아도 광명의 나라를 경축한다. 돌담과 눈의 조합으로 빚은 흑백은 레트로 감성을 부추긴다. 대리석의 차가움이나 인위적인 정렬로 배치된 타일에 견주랴. 불현듯 장롱 깊숙이 넣어 둔 앨범을 꺼내 놓고 먼지를 닦으며 들춰내던 시간이 있었다. 단발머리에 하얀 카라를 달고 입었던 검정 교복의 앳된 소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깔깔대던 시절로 회귀는 잠시 잠깐이라도 그 행복을 사수한다. 절제하려는 것도 아니건만 자연스레 인색해진 웃음이 아쉽다.
가지와 잎사귀만으로 서 있어야 했던 나무들에는 모처럼 눈꽃을 피웠다. 붓을 갈라지게 하여, 묻힌 먹물을 덜어내고 갈필로 그린 나뭇가지처럼 가지 끝만 떨고 있다. 산수화의 기법에는 겨울을 그릴 때, 여러 가지 색을 쓰지 않고 먹으로 농담을 주어 고요하고 절제된 추운 겨울의 쓸쓸함을 표현한다. 화려함이나 강렬함을 배제한 한 폭의 산수화에 숨소리마저도 낮아진다.
언제까지라도 내치고 싶지 않은 걸작을 긴 시간 허락받아야 하는 건 하늘의 몫이다. 우울한 하늘의 낯빛을 응시하다 문득, 눈이 녹아 추하게 질척거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서서히 사라져 주면 그 여운을 간직하고 추억할 수 있을 터다. 사위어 가는 인생도 그러하거늘, ‘열 가지 고른 날만 이시느냐, 이제라도 잘 살민 된다’(골고루 갖춘 날만 있겠느냐. 지금부터 잘 살아라)하신 어머님 말씀이 언제 적인가. ‘이제라도’는 평생이다. 포기하지 못하고 선망하던 회전의자, 휘갈기고 싶었던 최종 결재 자리는 내 몫이 아니었다. 체념만이 답이었던 시절은 무사히 지나갔으니, 소박한 삶이 소중하다.
나풀대는 눈은 무희들의 춤사위 같다. 하늘에서 땅까지 내려오는 공간은 눈의 무대이다. 눈은 엉키지 않은 실타래처럼 이어 붙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내린다. 우아한 자태는 고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나부끼다 돌연, 바람이 거칠게 다루어도 눈꽃 송이 송이를 피워내며 휘돌기만 할 뿐이다. 제 갈 길을 가겠다고 항변하지 않는 존재의 가벼움과 유연함으로 무사히 대지에 안착한다. 바람이 몰아쉬는 가파른 숨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내공이 깊은 무언의 수행자다. 눈은 너그러움으로 바람과 섞이는 지혜가 있었다.
망연히 바라보다 지나간 나를 꺼내 본다. 가지고 싶었던 것을 쉽게 잡을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그건 교만을 동반했고, 주장이 강하고 당돌한 나로 조각되었다. 배려나 관용은 남이 나에게 베풀어야 하는 일이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받기만 한 날들이었다. 독선과 아집으로 점철된 철없음이 와르르 깨질 때, 누구에게 떠넘기지 못하고 치러내는 대가는 혹독했다. 삶은 관계라는 너울 속에서 바둥거릴수록 더 꼬일 뿐이었다.
눈은 가벼운 몸짓으로, “영혼의 힘을 빼라.” 말씀 한마디 넌지시 건네신다. 삼라만상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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