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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태콩죽, 죽을 쑤다
오인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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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1.31  18: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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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大寒이 지났지만 절기의 끝자락은 얼음 속에 숨어 있다. 해발 300미터 명도암 마을은 노루의 울음만 두렁거리는 산사 풍경이다. 겨울바람 소리에 봄을 기다리는 설렘이 뭉개진다. 
 
 꽃불을 켜고 햇살 한 줌, 바람 한 줌 삼키며 열정으로 피운 애기동백. 열어젖힌 꽃에 까칠한 볕살이 내려서고 꽃그늘이 수런거린다. 속절없이 사그라져 가는 붉디붉은  꽃잎들, 숨 가쁘게 꽃을 피워냈듯이 찬 서리 만나 하염없이 떨어진다. 

 
 채소 텃밭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잠시 쪼그리고 앉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배추며 시금치가 눈雪을 비집고 머리를 내밀고 있다. 땅속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손으로 쓸어 보다가 한 잎 뜯어 입에 넣는다. 나물 향기가 입안에 잔잔히 퍼진다. 깊고 그윽하다. 꽃처럼 진한 향기는 아니지만 간들간들하는 바람을 등에 업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가슴속 뜨거운 응어리가 불끈 솟아난다.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처럼, 눈발이 날리고 매섭게 추운 겨울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연두빛의 속살을 지닌 서리태콩죽이다. 자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럽고 따뜻한 블랙푸드. 신장을 다스리고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하는 약재나 다름없는 해독음식이다. 
 
 어린 시절 배탈이 나면 어머니는 흰죽을 끓여 주시곤 했다. 흰죽을 한두 끼 먹고 기운을 차리면 원기 회복으로 콩을 갈아 콩죽도 끓여주셨다. 이런 뜨끈뜨끈한 죽 한 그릇으로 어지간한 배탈을 이겨내고 웃을 수 있었다.
 
 서리태콩을 휘리릭 씻어 물에 담가 불린다. 딱딱하게 응어리졌던 콩알이 무너지며 부드러워진다. 믹서에 넣고 갈아 준다. 뚜따따따~,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삶은 검은콩이 뭉그러지고 으깨지며 갈리면서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춤추는 무희처럼 매혹적이다. 짓누르던 나의 감정도 요동친다. 서리태콩을 채에 걸러 앙금을 내린다. 그 색깔 속에 지난 고통과 슬픔의 세월이 녹아난다. 향긋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들며 물 흐르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불린 쌀과 물을 냄비에 넣고 끓인다. 끓는 냄비가 달그락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젓는다. 덩달아 솟구치던 기포도 눙치면 불을 줄인다. 이렇게 불조절을 하다 보면 한숨만 푹푹 내쉬던 지난날들이 허기짐으로 찾아든다. 
 
 쌀알이 퍼지면 갈아놓은 서리태콩 앙금을 붓는다. 바닥에 눌지 않도록 천천히 저으며 약한 불에서 끓인다. 이게 맛난 죽의 비법이런가. 믹서기에 흔들어 놓은 물을 부어가며 농도를 맞춘다. 쌀알이 퍼지면서 부글부글하던 거품도 가라앉는다. 억누르던 감정도 숨을 고르며 신산했던 시간들이 수굿해진다. 죽 속에 갱년기 여자를 달래 줄 이소플라본이 무른 시간 속에 고소함으로 녹아 난다. 
 
 죽 한 그릇을 식탁에 올리니 잃었던 입맛과 기억이 떠오른다. ‘맛’보다는 ‘생존’으로 먹었던 죽. 가난한 시절의 허기를 채우고 고단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 한 끼니. 눈 속의 어린 시절 음식으로 다가온다. 
 
 뜨거운 죽을 식혀가며 먹는다. 죽 사발에 대추 고명을 얹고 물김치와 간장으로 차려낸 죽상이 소박하고 정갈하다. 고개를 숙이고 혼자 먹는 죽은 지난 삶을 반추하는 여유를 갖게 한다. 천천히 숟가락질하다 보면 옹색했던 삶도 부드럽게 지나간다. 
 
 서리태콩죽은 자주 먹는 음식은 아니다. 어쩌다 밥보다 죽이 생각날 때가 있다. 어둠이 내린 주방에 전등불을 밝히면 가끔 머릿속에서 믹서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하루 동안 낯설고 고단했던 시간의 흔들림이 컸던 탓일까. 
 
 시리고 고단한 세월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죽, 그런 죽을 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입에 넣으면 아무 맛이 없는 듯해도 먹을수록 죽 맛처럼 정이 깊은 사람, 매일 아등바등해도 죽이 척척 잘 맞는 살가운 삶을 사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된다.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옹졸하고 편협하게 살아온 것 같아 죽 같은 사람이 기다려진다. 
 
 창문 너머 봄을 재촉하는 바람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몇 남지 않은 나뭇잎이 내는 소리에서 죽의 속심을 듣는다. 이제라도 찰기로 뭉쳐진 서리태콩 죽처럼 눅진한 정으로 익히고 삭힌다면 또 다른 풍미로 남은 인생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죽을 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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