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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은미 시인 |
여름의 끝에 물들인 봉숭아물이 새끼손톱 끝에 아직 붉다.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그대로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으며 우스개처럼 손톱 깎기를 아직 주저하고 있다.
첫사랑이 다시 이루어 질리는 만무한 일이지만 재미삼아서라도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우리 세대의 일반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다. 개중에는 남세스럽다며 웃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가끔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 여겨질 때 나는 아직도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야기의 기원들을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온 이야기들을 더듬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서사구조 또는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할 때 가장 기억에 잘 남는다.
정서적으로는 무섭거나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인간의 심리·정서에 각인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도 가장 무서운 이야기로 남아있는 이야기는 '해님달님', '여우누이'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감동으로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단연 압권이다.
O.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도 감동적이고, 가난한 세 자매의 굴뚝으로 금화주머니를 전해주었다고 하는 성 니콜라우스의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또한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면 교회에서 나눠주는 과자나 사탕을 얻어먹으려 교회 마당으로 내달렸던 기억, 크리스마스 새벽에 멀리서 전해져 오던 성탄송의 아름답고 가벼운 전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물론 가난이 먹여준 경험들이다.
배고팠던 시절의 경험들이 따지고 보면 정신의 배고픔을 채워줬던 게 사실이다.
이렇듯 어렸을 때의 경험은 나이 들어서도 아련히 떠올리며 웃음 짓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야기가 주는 힘, 경험이 주는 힘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이런 감동적인 경험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으로 들어와서 선물을 주고 간다는 이야기를 믿는 초등학생은 거의 없다고 하니 말이다.
내 아이의 경우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상급학년으로 넘어가면서 슬슬 의심의 눈빛을 보이더니 요즘은 아예 믿지 않는 기색이다.
그래서 이 믿음의 상실이 주는 허탈감을 또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세상을 살다보면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보아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래도 살아볼만 하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힘은 어렸을 때 각인된 따뜻한 손길과 눈빛, 노래와 시, 이야기가 남긴 아름다운 감동, 뼈와 살에 새겨진 진한 경험 등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쿠폰으로 실시간 전달되는 이 시대, 굴뚝 대신에 택배아저씨가 선물을 전해주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가슴을 평생 따뜻이 덥혀줄 감동이라는 선물은 어떻게 챙길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와 노래가 사라지고, 선한 믿음을 각인시킬만한 경험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황폐 그 자체가 되고 말 것이다.
외로운 개인들이 허허벌판의 겨울나무처럼 오도카니 서있는 것 같은 황량한 이 계절에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살아있는 이야기 한 편씩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크리스마스 이야기처럼 가끔 꺼내보면 마음 따뜻해지는 그런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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