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제주칼럼 |
가혹한 겨울, 비탈에 선 슬픈 나무들에게 입맞춤을(영화 <변호인>과 “안녕들 하십니까”) 강희경 | 제주한라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
|
|
|
|
| |
 |
|
| 강희경 제주한라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
영화 <변호인>을 올해 수능을 치른 딸과 함께 보고 왔다. 대학생 진우는 시장통 허름한 국밥집 과부의 아들이며 차동영은 군사정권의 실권자로 고문담당 경감이다. 차동영이 진우에게 물었다. "네 사상이 뭐냐?". 고문 구타로 만신창이가 된 진우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실존주의...". 진우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진우의 맨몸뚱이가 수사관의 잔인한 몽둥이질에 차가운 바닥에 철퍽 뻗어버렸다. 머릿속 생각의 자유마저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차 경감은 바로 연달아 라면국물에 고춧가루를 섞어 살벌한 고문을 이어갔다. 그 순간 수건으로 가려졌던 진우의 얼굴이 내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매운 라면국물이 코로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숨을 멈췄다. 내 몸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듯 등골을 따라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박힌다.
차 경감이 그랬다. "전쟁이 끝난 것 같지? 휴전이야 휴전. 잠시 쉬는 거라고...". 그렇구나. 우리는 아직 휴전 국가에 살고 있구나. 우린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가 아닌 완전한 무의지 속으로 함몰될 수밖에 없다는 거구나. 남과 북의 대치 구도 아래선, 우린 일상의 비탈에선 현실의 고통도 권력의 부당함도 감수하고 용납하고 입 닥치고 묵인해야 한다는 거구나.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라는 의식 보다는 전쟁의 피해자란 의식을 자각해야 하며, 나 개인 하나쯤 소멸되어 방기된다 하더라도 찍소리도 말라는 거구나. 그러지 않으면 영화 속의 진우 또래인 내 딸아이도 진우처럼 전쟁 같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거구나.
영화관 밖은 다시 가혹하리만큼 추운 겨울이다. 진우가 그 깊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와 깨끗한 들꽃처럼 웃어주었던 그 날이 바로 어제 같은데 말이다. 학원민주화의 봄날, 사색의 원에서 푸릇한 솔잎 향기에 취해 꿈꾸던 시절은 어느덧 사라져 버렸는가. 매서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턱을 치받게 한다. 오늘날 차 경감이 다시 살아나 무소불위 권력의 환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매카시즘이 따라주는 술잔에 취해 광기를 부리고 있는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 경감이 진우를 고문했던 손으로 담배를 꼬나물고는 비탈진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 등교하는 우리를 보며 조롱 섞인 힐책을 한다. 우리가 좌측으로 너무 많이 비뚤어져 있다고. 학교 담벼락에 ‘안녕들 하십니까’와 ‘안녕하지 못합니다’ 라는 대자보가 줄지어 붙여지고 있는 것을 흘겨보면서, 내용은 읽지도 않고 총장의 허락도 없이 게시물을 붙였다고 위법성만 따지려 든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는 진우에게만 변호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교육부의 ‘안녕 대자보’ 차단 공문으로 더 이상 메아리를 내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대자보의 행렬이 애처롭기만 하다. 헛되이 벽보를 붙인 손들이 더욱 시려 보인다. 그들의 목소리는 굶주린 조카를 위해 한 조각 빵을 훔친 죄로 평생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젊은 장 발장들의 하소연은 아닌가?
‘안녕들 하신가요’는 역사와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거창한 담론을 담은 것은 아니다. 거기엔 우리 사회 전체와 개인 간에 발생하는 다양한 현실적 소재의 갈등적 만남이 비극 혹은 희극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이 대자보들은 이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혼란이 이제는 극복되어야 할 단계에 다가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질문이다. 가혹한 현실에 정면으로 부닥쳐 그것을 의식의 영역에서 극복할 실마리를 찾아보겠다는 젊은이들의 옹골찬 의지가 빛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는 결코 낙관적인 결과를 가질 수 없다는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불안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진우가 말한 것처럼 “죽은 바위를 넘을 수 있는 살아있는 계란”이 될 수 있을까? <변호인>은 사회 변혁이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실천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개인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을 통해 사회와 역사가 변화되는 것이며, 한 개인의 삐딱한 시선의 변화가 시대정신에 발전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청년들의 울음소리를 두꺼운 유리벽에 가두지 말자. 그들이 울면 우리도 함께 울어보자. 젊은이들이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를 꿈꾸고, 시와 사랑을 노래하고, 희망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자.
가혹한 겨울, 비탈에 선 슬픈 나무들의 발등에 입맞춤을 하고 싶다.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