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
서울을 왕래하느라 자주 비우는 함덕 집에서 화분 때문에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이맘때였습니다. 거의 한달 만에 돌아 오는 길이었는데, 호접란은 양란이어서 추위에 약한 줄을 알면서도 다른 화분들과 함께 추운 베란다에 놓아 둔 것이 생각나서 집에 들어서자 마자 이놈을 드려다 보았습니다. 다행하게도 잎이 싱싱하게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반갑고 기특한 마음에 당장 이놈을 따듯한 방안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문자 그대로 잎과 줄기가 녹아 내린 것입니다. 온도 차이가 족히 10도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에 그 동안 추위에 대항하여 힘겹게 싸워 오던 힘이 다 허물어졌나 봅니다.
그리고는 약 한달 후 설날이 되었습니다. 상태는 더 악화되어 색깔마저 누렇게 변해 버리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들이 신년기념 한라산 겨울등반을 하겠다고 내려오게 되어 있던 참이라 집안청소 겸하여 이놈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를 생명에 대한 일말의 미안한 감정을 애써 숨기면서 말입니다.
뒷마당에는 동백꽃이 피어있었습니다. 그 옆에 전에도 몇 개의 화분을 처분(?)한 장소가 있어 그리로 갔습니다. 막 호접란 화분을 거꾸로 뒤집어 흙을 털어 내고 있던 나의 눈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들어왔습니다.
겨울의 딱딱한 땅을 뚫고 히아신스의 구근이 둥근 머리부분을 반쯤 내놓고 있는데 그 위로 두 개의 꽃대가 뻗어 나와 진 보라색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에 내가 버린 놈이 분명했습니다.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며 조셉 콘라드의 소설 "로드 짐"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해양학교를 막 졸업한 일등항해사 짐은 처녀 출항에서 큰 풍랑을 만나 그가 탄 아주 낡은 배가 침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승객은 전부 성지순례 길에 오른 수백 명의 이슬람 교인들이었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짐과 승무원들은 "알라"만을 부르며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이들을 배 위에 남겨 놓은 채 몇 개 안 되는 구명선에 옮겨 타고 배를 버립니다.
그렇게 며칠을 천신만고 끝에 어느 항구에 도달한 그들은 자기들이 버렸던 바로 그 배, "파투나"가 거기에 유령처럼 정박하여 있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감히 로드 짐과 스케일은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그 때 받았습니다.
황급히 이미 땅 위에 버려진 흙을 헤치고 호접란의 뿌리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외견과는 다르게 단단한 무엇인가가 손끝에 전해져 왔습니다. 아직도 삶의 의지를 그 속에서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신주 모시듯 이들을 다시 화분에 모아 담고 방안으로 돌아와 식물이 동면하기에 적당한 곳에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다시 꽃을 피우지 않아도 좋아. 나비처럼 펄럭이는 너의 꽃 이상으로 너의 푸르른 잎을 경배하겠어. 제발 죽지만 말아 다오."
그 후 매년 설날이 다가 오면 회상되는 에피소드입니다. 새해에도 두 가지를 명심하려 합니다. 사물을 외견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그 하나요, 생명은 그 자체가 고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끈질긴 힘은 더 숭고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주신문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