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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기철 시인 |
이사 온 명도암 집 창밖에 찹쌀가루 같은 눈이 바람 없이 풀풀 내린다. 펼쳐진 소나무 숲에도 쌓이고 노루손이오름에도 쌓인다. 여긴 남방이지만 이럴 땐 북방의 시인 백석이 생각난다.
그가 27세 때인 1938년 함흥 영생고보 선생을 그만 두고 서울로 와 조선일보에서 ‘여성’지를 편집할 때, 거기(3월호) 발표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생각난다. 같은 달 ‘조광’지에 그는 시 ‘白樺’도 발표하고 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강원도 이북 지방에서만 자란다. 겉은 희다. 우리는 그 나무를 이런 시 속에서만 읽고 상상할 뿐이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그 많은 평안도의 토속 음식들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안남도 신안주 분이셔서 설날엔 늘 손바닥만한 ‘소만두’를 빚어 주셨다. 올 설에도 몇 년 째 우리 집에 못 오실 어머니의 소만두국이 그립다.
자작나무라 하니 제주시 신제주에서 정실 가는 길 입구 쪽에 있는 ‘자작나무 카페’가 생각난다. 이곳에서 몇 안 되는 멋있는 찻집인데, 그 이름으로 하여 운치가 더 크다.
제주의 음악인 우상임 씨가 하는 ‘자작나무 음악회’도 있다. 그녀는 러시아에 유학을 한 이인데, 거기 자작나무가 많아 그렇게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작년에 구 제주의료원 앞에 있는 ‘각 카페’에서 매달 한 번 씩 작은 음악회가 열려 나도 이따금 갔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 아래에는 북방의 슬픔 같은 것이 있다.
얼마 전 여기 시인 양순진의 시집 ‘자작나무 카페’가 나왔다. 오랜 설렘과 뜨거움과 부서짐의 시간을 넘어 이렇게 감칠맛 나는 시편들이 모아졌다.
‘한참 오래 전/정실길 걷다가 긴 나무 기둥 심어진/집 한 채 보았네/안은 볼 수 없었지만 나무줄기에 잎이 돋고/자작나무 카페라는 간판 올려졌을 때/또 한 번 스치고 지나갔네/그대와 함께였네/그대와 나 아직 서먹서먹해서/그 문 열고 들어가지 못했네/카페 문 여는 것보다 그대 맘 여는 게/먼저였기에 마음 깊이 숨겨두었네/그대 안 궁금한 것처럼/카페 안 궁금했지만/다음 生에 라고 약속했네/…’(‘자작나무 카페’)
이 시집의 시들 중 이처럼 사랑을 갈구하는 목소리의 시들이 참 좋다.
‘…/프란체스카,/울지 말아요/그가 놓고 간 향기는 사라지지 않아요/천 년 후에도 구름은 기억해요/입맞춤은 천 송이 꽃으로 흩날려요/당신의 눈 속 파닥이는 나비 떼를 보세요/꽃가루에 묻힌/당신/…’(‘엘레지’)
‘오늘도 멈추었다/능소화 핀 담장 앞/한 송이 내 발 밑에 뚝 졌다/사랑이 지는 속도로//…’(‘능소화 핀 집’)
‘남쪽 섬 유월은 마가렛으로 가득해요/당신의 마음처럼 뿌려진 흰 소금 같은 꽃/하얗게 바랜 당신의 언어로 한 잎 한 잎 따서 점치는 동안/마음은 그만 저물어버렸네요//…’(‘마가렛’)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아무도 없다 느낄 때/눈앞에 섶섬이 있었다//…’(‘섶섬이 보이는 정류장에서’)
나는 이 시집을 들고 오늘 저녁 자작나무 카페로 가야겠다. 거기 창가에 앉아 백석을 생각하고, 그 ‘누구’를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해야겠다. 내 시원의 땅, 그 북쪽 지방을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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