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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제주칼럼 |
까치설날, 섣달그믐 앞에 ‘마지막 잎새’를 부침 강희경 | 제주한라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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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희경 제주한라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
까치설날이다. 그 조그만 미물이 어떻게 먼저 아는 걸까? 그것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예쁘지도 않은 목청에 오두방정이니 선잠을 깨운다. 까치가 전해준 것처럼 오늘은 한 해가 다녀가고 새로운 해가 찾아오는 날이다. 해는 새 얼굴인데 나는 과연 그만큼 태평하고 풋풋한 얼굴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녹차 한잔에 이런저런 상념을 담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설날마다 해는 새로워지지만 사람은 낡아간다는 사실이다. 까치가 알리는 설날마다 한 살씩 늙어가기는 해도 그만한 실속은 없다. 이제 내 나이도 예전엔 아득하게만 보이던 쉰 고개를 어느덧 훌쩍 넘었다. 그래도 지금은 백세 시대라 하니 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 늙지도 않았다고 속물적인 위안을 삼는다.
인생의 벼랑에서 어떻게 하겠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장 아래로 뛰어내리겠다고 가히 답할 만큼 기개 넘치는 새파란 젊음은 지났다. 그렇다고 하늘로 오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펼쳐 보일 지혜의 날개도 아직 키우지 못했다. 지나온 삶의 마디마디에 남겨둔 미련들과 번민들로 당장이라도 실성할 것 같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저 어느 고요한 산사의 새벽 죽비소리가 눈물이 맺히게 그립다.
아니다. 일단은 먼저 나와 같은 속세를 살아가는 친구를 만나봐야겠다. 나보다 훨씬 더 사고의 뿌리가 깊은 친구가 나처럼 삶의 오만에 패배하고 똑같은 고민에 빠진 채 내 가까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예기치 않았던 비밀병기처럼 미래의 삶을 향한 나의 힘을 북돋우리라.
빈대떡에 막걸리라도 앞에 놓고, 십 년 후의 우리의 모습을 함께 그리며 박장대소하며 수다를 떨고 싶다. 연봉제로 얄팍해진 봉급으로는 의료 민영화에 밀려 뒷골목으로 들어간 싸구려 치과 밖에는 찾을 수 없을 미래는 술판의 안주가 될 테지만 여유 있는 농담으로 순간이나마 위로할 수 있으리라.
그 미래에는 싸구려 틀니 밖에 맞출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말이 새지 않을까, 남 보기 흉하지 않을까 하면서 앞서 두려워하지는 않으리라. 백발의 얼굴은 주름지고 앙상한 어깨는 구부정해져도, 정신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지고 거기에서 지혜와 행복의 메시지가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솟아나오도록 노력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간혹 사소한 예절이나 약속을 넘겨버리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결코 명랑한 대범함을 잃지 않겠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우리 젊은이들의 기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가엾고 고달픈 나뭇잎처럼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대의 간극에 의해 찢겨나간 공동체의 그물을 부지런히 기우고, 넓고 깊게 바다 속을 누비는 저인망 같은 포용력으로 그들을 모두 감싸 안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십년 후에도 오늘처럼 그 동안 얼마나 시시한 일에 평생을 걸고 헛된 노력을 했는가를 후회하면서, 결국 젊은이들의 절망을 어찌하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만 봐야 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희망과 회한이 교차하는 오늘, 섣달그믐에, O. Henry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 문단이 문득 떠오른다. 마주할 때마다 내 마음자리 어딘가에 묻혀 있던 따뜻한 미소가 얼굴 위로 가득 번지게 하는 글귀다.
“존시! 창밖으로 저 벽에 있는 담쟁이덩굴 마지막 잎새 좀 봐. 바람이 부는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게 이상하지 않니? 아! 저건 베어먼 할아버지의 걸작이란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날 밤, 그 분이 저 자리에 그려 놓으셨단다.”
조그만 잎새 한 장. 그것은 반인반수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겉모습에다 술에 찌들어 허풍만 일삼으며 25년간을 캔버스에 아무것도 그려 넣지 못한 늙은 삼류화가에 불과했던 베어먼의 걸작이었다. 가난한 젊은이의 꺼져가는 생명에 다시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그의 소박한 선의가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고의 걸작을 그리게 한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조금도 흔들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던 것은 마지막 담쟁이 잎새만이 아니었다. 베어먼의 자그만 소망이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대신 내어줄 수 있는 희생으로 승화되어 영원히 낡아지지 않을 고귀한 정신으로 거기에 새겨진 것이었다.
설날이 올 때마다 한 살씩 낡아가면서 고작해야 한 세기도 채우기 힘든 게 인간 육신의 삶이다. 섣달그믐, 오늘 밤엔 마지막 잎새를 그리는 심정으로 주위의 가난한 이웃과 아픈 젊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인정 많은 어른이 되겠다는 착한 각오를 다지며 뜬 눈으로 새해 설날을 맞이하고 싶다. 모두에게 태평과 풋풋한 젊음을 기원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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