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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길 시인 |
나이가 들면서 자꾸 잊어버리는 것들이 많다.
<기억상실>의 증세가 일어나는 것인가.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들을 자주 잊어버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불안하고 겁이 나는 일이다.
얼마 전에는 은행에서 대출관계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할 때 내 주민등록번호의 끝 세자리 숫자를 잘못 적어 낭패를 겪은 일이 있었다. 원래 숫자개념에는 기억력이 약한 편이지만 자신의 주민번호를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었던 일이었다.
어떤 때는 내 휴대전화 번호를 잊어버려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
집에서는 늘 사용하는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온통 난리를 펴서 아내와 다툼을 벌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들이 왜 그리 많은지, 특히 숫자들이 너무 많고 헷갈린다.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 말고도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번호들, 이를테면 집 주소번지, 밭 번지, 아파트 호실번호, 아내와 아들의 전화번호, 생년월일(나이) 등, 또 ‘비밀’자가 붙은 번호들은 왜 그리 많은가. 현관 비밀번호, 책상 서랍, 금고, 캐비닛, 통장, 현금카드, 컴퓨터 계정 비밀번호 등….
나는 이런 숫자들을 수첩에 꼼꼼히 적어놓고 다닌다. 돈지갑과 함께 항상 휴대하는 수첩에 적어두어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꺼내보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할 때가 많아 곤란을 당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뼈가 삭아 관절이 닳듯이 뇌(腦)도 닳아간다. 기억력이라는 것은 뇌가 관장하는 일이다. 의학서적에 의하면 뇌 활동에 대한 기능적 설명이 이렇게 나와 있다.
이성(理性)을 담당하는 대뇌(大腦)가 좌·우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좌뇌는 언어, 논리, 문자, 분석, 기호 등 조직·해독·판단 기능을 하고 우뇌는 음악, 미술(회화), 문학, 이미지, 직관력 등의 기능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논리적 사고가 우수한 사람, 곧 좌뇌가 발달한 사람을 <좌뇌형>이라 하고, 감각적이고 창조력이 뛰어난 사람을 <우뇌형>이라고 부른다. 이런 좌뇌, 우뇌의 활동 차이는 어느 정도 선천적인 것이지만 환경, 직업, 교육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변화된다고 하였다.
흔히 “머리 회전이 빠르다”, “그 사람, 머리가 잘 돌아간다” 라고 할 때 좌우 양쪽 뇌의 능력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좌우 뇌 사이에 뇌량(腦梁)이라는 것이 있어 양쪽 반구를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한다.
뇌를 컴퓨터라고 가정해본다면, 뇌량은 좌측 컴퓨터와 우측 컴퓨터를 동시에 작동시켜 사용할 때 이 두 개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전선 구실을 하는데 무려 똑딱하는 일초 사이에 수십억 개의 정보를 교환하게 해서 판단을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좌뇌는 점차 쇠퇴해가고 반대로 우뇌는 단련할수록 좋아진다고 한다. 따라서 우뇌가 약해지면 뇌 전체의 집중력이 떨어져 기억력, 판단력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뇌의 컴퓨터는 늙어감에 따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우뇌 컴퓨터는 계속 작동시키면서 단련해야할 일이다.
두뇌를 단련시키는 일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림 맞추기, 퍼즐이나 미로 찾기, 운동으로는 캐치볼 놀이 등이라고 나와 있다.
어느 유명한 노(老)시인의 자서전 글에서 보면, 자신의 기억상실을 예방하는 방법(단련)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좌정하여 경전 읽기를 한 시간 가량 하고 산책길에서는 꽃과 나무 이름 외우기, 강(江)과 산(山) 이름 외우기, 도시와 마을 이름 외우기 등을 수십 번씩 반복하면서 걷기 운동을 한다고 했다.
부지런히 읽고, 쓰고, 외우기, 부르기 등을 하면서 뇌를 단련시켰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기억이 잘 나지 않으면 노망(老妄)들기 시작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아무리 시쳇말이라고 하지만 두렵고 무서운 소리이다.
어느 날 동년배 친구와 식당에서 점심을 끝내고 나오다가 잠깐 화장실에 들러 소변을 보고 급한 나머지 바지의 지퍼를 올리지 못한 채로 나온 적이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바지의 자물쇠를 연 채로 나오다니. 친구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자네, 초기 증세야”라고 놀려댔었다.
이러나저러나 나도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잊어버림을 막기 위해서 항상 메모하고 표시해두는 습관을 갖자고 작정했다.
책상과 컴퓨터의 탁자 위, 또는 현관의 신발장 위, 부엌의 식탁 옆에 메모판을 걸어두고 거기에 오늘 할 일, 해야 할 내용, 약속, 모임 날짜 등을 라벨에 적어두는 방법이다.
그리고 또 벽걸이 달력과 책상용 다이어리에 어떤 모임과 장소, 시간까지 꼼꼼히 적어두고, 생일날이나 기념일, 제삿날 같은 기억해 둬야 할 날들은 눈에 잘 띄게 표시해놓는 일이다.
가며오며 보고, 필요할 때 들여다보는 이 방법이 나에게는 잊어버리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한 수단이요, 단련이다.
어느 늙은 철학자의 독백 한마다가 생각난다.
“기억력이란 놈은 항상 감시를 하고 단련시키지 않으면 늙어가는 나이와 함께 어느 틈에 달아나버린단 말이야. 이제 늙었다고 이놈이 얕볼 테니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읽고 쓰고 해야겠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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