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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기철 시인 |
‘아시아를 가지고 체스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위 아 더 월드'를 부르는/이 좋은 세상.//가깝고도 먼 나라 사람들이/자진해서 이웃 나라의 팔뚝에/민주주의의 주사를 놔주겠다고 달려오는/이 아름다운 세상.//그러나 하나같이,/ 칼을 빼지 않는 대신에 칼집을 휘두른다./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뭘 좀/아는 체하자는, 세계적인 제스처일 뿐//역사는 다시,/겨울을 무덤 속에 넣어두려고 궁리한다’(이세룡, ‘웨스턴’)
이런 약력이 있다. '1947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공업고등학교 인쇄과를 졸업했다. ...' 1988년에 나온 '채플린의 마을'(고려원)이라는 시집에 찍혀 있는 시인 이세룡의 약력이다. 예전에 나온 서정춘 시집 '竹篇'과 함께 최종 학력인 출신 고등학교 이름을 당당히 밝힌 시집은 몇 안 될 듯하다.
이 시집의 표지에는 채플린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와 있다. 아주 키가 작은 한 사내가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붙이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헐렁한 바지를 입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옆에는 한 아이가 손으로 그 쪽을 가리키고 있다. 허나 채플린의 영화를 본 건 이 시집이 나온 후 TV등을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우리 훨씬 이전 세대에 나왔다.
이 시집은 '시인의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영화의 내용을, 혹은 제명에서 오는 느낌을 그대로 혹은 정반대로 쓴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웨스턴'은 찰스 브론슨과 크라우디나 카르디나레가 주인공으로 나온 서부극이었는데, 1970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때 혼자서 코리아 극장(현 제주영화문화예술센터) 뒷좌석에 앉아 이 영화를 보았다. 보안관인가로 나왔던 찰스 브론슨이 소란한 마을을 평정하고 떠날 때, 가까워진 그 마을의 한 처녀가 말에 올라탄 그에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자, "some day!"라고 말하곤 유유히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였다.
마지막 장면이 뇌리에 선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아마 미국의 패권주의를 떠올린 것 같다.
'아시아를 가지고 체스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민주주의 주사를 놔주겠다고 달려오'지만, '칼을 빼지 않는 대신에 칼집을 휘두르는' 세상을 풍자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서방의 오만함을 떠올린다. 영화의 주인공은 마을을 평정하고 유유히 사라지지만 그 웃음에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함이 서려 있다.
영화는 두 시간 정도로 내게 현실을 잊게 해 준다. 시인의 표현대로 그것은 꿈의 공장이다. 일금 팔천 원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꿈의 세계로 갈 수 있는가.
이 시집의 시들 하나 하나는 각각이 다른 꿈의 세계들이다. '나의 청춘 마리안느', '일요일은 참으세요', '자전거 도둑', '술과 장미의 나날', '쉘브르의 우산', '페드라', '세브리느', '티파니에서 아침을', '종착역', '북호텔', '그토록 오랜 부재', '시민 케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왕과 나', '밤의 열기 속에서', '남과 여'….
오랜 전 문예지에 나온 그의 시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왜 이렇게 시를 썼을까 하던 의문이 이 시집을 읽고 비로소 풀렸다. 그 때 나는 영화를 제재로 썼다는 것을 몰랐다. 톨스토이 원작의 그 영화는 내게 지리할 정도의 길고 웅장한 스펙타클이었다.
이 영화를 그는 다음과 같이 어린 소년의 목소리로 그야말로 부드럽게 노래한다. 그의 시처럼 진정 전쟁이 없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인가.
‘집과 집 사이의/담장이,/나라와 나라 사이의/국경이,/모두 과자로 되어 있다면//전쟁 때문에/예쁜 여자들이 과부가 되는 걱정도,/착한 아이들이/고아가 되는 불행도 없을 겁니다//사람들은/서로 앞을 다투어/평화를 지키려고 애쓰겠지요/추석 때 떡을 만들거나/추수감사절에 과자를 만드는 사람들처럼//이웃과 함께 음식 나눠 먹으며/서로 앞을 다투어/평화를 지키려고 애쓰겠지요/집과 집 사이의 담장이/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모두 과자로 되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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