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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광렬 시인 |
김종길 씨의 번역본인 ‘20세기 영미시선’은 내가 아끼던 책이었다. 학생 시절 청계천 일대 고서점에 들렀다가 한 눈에 반해 샀었다. 군대 생활 막바지에 휴가 나왔다가 들고 갔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시집을 읽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호기심에 가져갔다가 돌려줄 기회를 놓친 것이리라. 그 순간의 애석함과 서운함이 손에 만져지는 듯하다.
하도 오래 되어서 지금은 뚜렷이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시선(詩選)에는 워즈워드, 바이런, 셸리, 키츠 등의 낭만파 시인들과 주지주의 시인인 T. E. 흄, E. 파운드, T. S. 엘리엇 등의 시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들은 젊은 나의 피를 꿈틀거리게 했다. 때론 절망으로, 때론 슬픔으로, 때론 놀라움과 전율과 환희로 내 영혼을 뒤흔들어놓았다.
‘4월은 가장 잔인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며/ 추억에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었었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다.’
T. S. 엘리엇의 저 유명한 시, ‘황무지’ 앞부분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었거나 들어보았음직한 낯설지 않은 시구이다. 그럼에도 여기 언급하는 것은 이제 봄이 오고 있다는 잠재의식의 발로에서일까? 어쨌든 이 시는 최소한 두 갈래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먼저 시인 자신의 삶은 불행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성격적 요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평생 그는 강박불안증세 또는 결벽증세 속에서 지냈다. 내성적이어서 그런지 사랑의 감정을 드러낸다든지 이별의 슬픔을 토로한다든지 하는 감성적인 행위를 배제했다.
아내와의 잠자리를 싫어했고 이로 인하여 둘 사이도 좋지 않았다. 그는 이를 상쇄하기 위하여 더욱 지적인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는 모든 생명을 소생시키는 ‘4월’이 어쩌면 잔인한 달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있는 견해는 이 시가 세계 제1차 대전의 바탕 위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산업사회는 양질의 무기생산을 가능케 했고, 비단 전쟁무기에 극한해서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팽창은 전쟁과 더불어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고 인간의 심성까지 메말라 붙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불행의 망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간신히 그 순간, 순간의 공황상태를 가냘프고 여리게 견뎌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속에서 자연은 여전히 봄을 불러들이고 새 잎을 돋게 하고 꽃을 피워낸다. 그러한 자연의 작용은 황폐함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준다. 인간이 무기력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봄’은 인간들에게 잔인한 계절일 수밖에 없다.
왜 하필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인간은 오히려 무기력해질까? 소생하는 자연의 힘과 함께 인간의 에너지도 충만해야 하는데 나타나는 현상은 그 반대다.
물론 엄동설한을 이겨내느라고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탓도 있겠지만, 죽은 상태나 다름없는 것들 속에서 봄은 새로운 생명을 꽃피워내는데 반해 인간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일테면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는 바로 황폐한 정신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처럼 약동하는 꽃을 피워낼 수 없다.
이해타산과 탐욕이라는 중증장애랄까 병리현상을 앓고 있는 인간의 어느 골짜기에 지고지순한 꽃이 피어날 것인가?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인간은 자연에게, 약동하는 생명들에게 여러 면에서 오래 전부터 이미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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