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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은미 시인 |
정지 신호에 따라 차를 세우니 신호등 앞에 선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내 시선이 멈춘다. 우리 집 앵두나무만한 키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웃고 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듯한 여자애와 엄마가 손을 꼭 잡은 채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마도 학교생활은 재미있느냐,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느냐 하는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새싹을 바라보듯 흐뭇함과 신비로움, 뿌듯함이 배어 있다. 집에서는 아직 애기인 아이가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다닌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이 되었다는 건 제 발로 낯선 세상 밖으로 나선 첫걸음이다. 책가방을 메고, 골목을 나서 학교에까지 혼자서 가야 한다. 교실에 들어서면 낯선 선생님, 낯선 친구들, 낯선 규칙들이 기다리고 있다. 얼굴도, 물건도, 건물도, 이름도 다 낯설다.
온통 낯선 것들로 인해 불안이 엄습해오면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울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꾹 참고 정해진 시간에는 꼼짝 없이 교실에 있어야 하고, 선생님이 일러주는 알림장도 잘 적어야 한다.
조금 있으면 받아쓰기 시험도 봐야 한다. 점수가 매겨지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평가되기 시작한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뒤에서 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었다. 민망함을 뒤로 하고 가속기를 길게 누르는 데 아련한 추억들이 물밀듯 밀려온다. 어느새 나는 초등 1~2학년 시절 속으로 들어간다.
그 시절 나는 참 많이 걸었다. 학교까지의 거리가 어른 걸음으로 1시간은 족히 떨어진 곳에 우리 집이 있었던 터라 학교에 가려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산과 언덕이 많아서 특히 눈이 오는 날이면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던지.
그래도 가끔 동네 아저씨가 경운기를 몰고 가다 나를 태워주는 날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도 연례행사처럼 어쩌다 있는 일이었기에 기대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렇게 먼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학교가 좋았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종합장이나 깍두기공책에 그려준 달팽이 그림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숙제는 대체로 글자를 따라 써오라는 것이었는데, 글씨를 예쁘게 잘 쓰고 가면 달팽이를 세 개, 네 개, 다섯 개까지 그려주셨다.
나는 달팽이 다섯 개를 받으려고 글씨를 정말 정성스럽게 썼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달력을 접어서 깍두기공책을 만들어주시면 나는 그 위에다 침을 발라가면서 글씨 연습을 했다. 달팽이 다섯 개를 받으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미련스럽기도 했지만 마냥 순진하기만 했던 한 아이가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막연하게 학교가 좋았다고 느끼는 근거에는 ‘칭찬’이라는 게 있었다. 걷는 것도 힘들고, 받아쓰기 시험 보는 것도 스트레스였을 텐데 선생님의 칭찬, 부모님의 격려가 마냥 신이 났던 걸 보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실감나기도 한다.
요즘처럼 칭찬받기 어려운 시대는 없을 것이다. 학부모들의 얘기를 들으면, 아이가 90점을 받아도 칭찬할 거리는 못된다고들 한다. 다들 90점 이상은 받기 때문이란다.
모르던 글자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인데, 받아쓰기는 당연히 100점을 받아야 하고, 아직 한글도 잘 모르는 초등학교 1,2학년생이 영어도 유창하게 해야 한다고 하니 도대체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으로 칭찬을 받을 것인가.
신호등을 혼자서 건너고, 글을 혼자서 읽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공부도, 재능도, 외모도 상대평가하면서 칭찬을 아끼는 이 시대가 참으로 서글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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