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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기철 시인 |
20년을 아파트에서 살다가 제주시 도심의 동쪽 한적한 명도암의 전원주택으로 옮겨올 때, 떠오른 것은 헤르만 헤세, 고은, 장석주였다. 시골로 내려가 더 원숙한 세계를 펼친 헤세나, 경기도 안성 이후의 시인 고은, 장석주를 생각하며, 언강생심 명도암 이후의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예전부터, 어울리는 예인들이 제주 도심의 서쪽이나 동쪽 시골로 가 종종 터를 잡고 있어 우리는 그걸 흔히 ‘동편제’, ‘서편제’라 부르기도 한다.
서편제의 경우, 대표적인 이가 화가 강요배로, 그는 벌써 10여 년 전, 한림읍 귀덕리의 하천가에 ‘화사畵舍’를 짓고, 여기 제주에 스민 정감을 짙은 화필로 옮겨가고 있다. 그의 화사 벽 전체엔 이 겨울 담쟁이가 촘촘하고 화단엔 수선화, 매화도 피어나고 있다.
지난 달 그의 작품 보관 공간인 ‘화안고畵安庫’의 상량식에 친구들과 가 보았는데, 이미 귀덕 사람이 다 된 듯한 그의 눈빛이 이제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화안고가 다 세워지면 여기는 우리 미술의 또하나의 ‘장소’가 될 것 같다.
서편제의 또다른 이는 소설가 겸 번역가 김석희로, 그는 서울로 대학을 가며 여길 떠난 후 30여 년 만에 귀향하여 애월읍 신엄리 바닷가에 아담한 이층집을 짓고, 번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66세까지만 일을 하겠다는 그는 틈틈이 애월리 쪽으로 가서 술도 하며 지내는 모양이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 3대 번역가에 들었는데, 이젠 자기만 남았다고 한다.
또 서편제의 예인으로 도예가 고원종이 있다. 아라동에서 큰 도로 위쪽의 유수암리로 옮겨간 후, 예전의 도공처럼 묻혀 자기를 굽고 있다. 유수암에는 또 예술을 좋아하는 학자 김정기 선생도 와 살고 있어 이들 서편제 끼리는 거기서 자주 어울리는 모양이다. 화가 정용성도 그 부근에 가 살고 있다.
서편제에 비해 아직 세는 약하지만, 동편제도 근래 화가 오석훈이 조천읍 선흘리에 화실을 짓고 좌정하면서부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방송국에 오래 있으면서 작업의 손을 이어왔지만, 이제 자유로워지면서 더욱 화필을 가다듬을 기세이다.
그의 작업실은 검은오름 옆 북쪽 길로 한참을 가다 오른쪽으로 꺽어 또 한참 들어간 숲속인데, 좀 멀고 구석진 감이 있으나, 담력이 센 그가 여기서 어떤 세계를 이룰지. 아니, 뭘 이루지 못하면 어떠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여기 김순이 시인이 얼마 전 성산읍 난산리에 초가집을 개조한 집을 마련하여 옮겨갔다고 한다. 밋밋하던 제주의 동쪽 끝이 이제 그녀로 하여 생동하는 듯하다.
이 섬의 군데군데 예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 섬을 얼마나 생기 있게 하는 것이랴. 오승철 시인도 성산 수산리에 작업실을 마련했다니 이 섬의 동쪽 끝에 시의 서기가!
판소리 서편제의 음색은 구성지고 애절하며, 동편제는 웅장하고 그윽한 음조를 바탕으로 한다. 서편제는 전라도 섬진강 서쪽 광주, 나주, 담양, 화순, 보성 등지에,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 남원, 순창, 곡성, 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이다.
제주도는 서쪽과 동쪽이 풍광, 지질, 기후, 기질 등이 많이 달라 거기서 배태 되는 예술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산북만을 얘기하고 있으나, 한라산 남쪽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더 많은 예인들이 서편, 동편으로 옮겨가 살며 제주 예술이 더욱 독특하게 여물어가기를. 이제 동편제에 편입한 내게도 그 ‘흥보가’의 ‘제비 몰러 나간다’의 흥취처럼 시의 붓이 더 활달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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