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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
몇 해전 서울 강남의 Y 성당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정이 있어 차를 몰고 갔는데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주차 안내를 하는 자원봉사자가 말했습니다. "주차장이 다 찼으니 끝까지 들어가지 말고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로 한쪽 벽에 바싹 붙여 세우세요"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는 꽤 길었습니다. 거의 다 내려가서 주차안내원이 시킨 대로 차를 한쪽으로 세우려고 정차했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차에서 내리더니 왜 더 가지 않느냐, 이러면 몇 대 더 못 세우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것입니다.
잠시 주저하는 저에게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나는 이 성당에 몇 년째 다니는 교인이다. 안에도 자리가 많다. 주차안내원 말을 듣지 말고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라며 한심하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주차장 내부로 진입하여 보니 주차안내원의 말대로 지정된 주차공간은 다 차있었고 빈 공간이라고는 차가 빠져 나올 통로뿐이었습니다. 거기에도 이미 다른 몇 대의 차가 주차를 해 놓은 터였습니다.
미사 내내 강론이고 기도고 집중이 안 됐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서로 빠져 나오려고 큰 혼잡이 벌어 졌음은 물론입니다.
시킨 대로 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은 여러 해가 흘렀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함덕-신촌 구간에는 "절대감속 30킬로" 표지가 반복해서 여러 개 세워져 있는데도 대개는 그 두 배의 속도로 주행하고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4차선도로 확장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도로 사정은 이전 2차선이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혼자 30킬로를 지켰다면 분명 바보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일주도로를 달리다 보면 누구나 목격하는 광경이 또 있습니다. 전후 좌우 차도 보행자도 없는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등은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대형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국회에서는 새로운 법을 만든다고 법석입니다. 법이 부족해서 사고가 난 것이 아닌데도 매번 새로운 법을 통과시킵니다. 있는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새 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일본과 비교하면서 우리나라의 국민성을 탓하는 분들의 의견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순하여 남을 짓밟지 않으며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착한 심성을 지닌 것이 우리네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위의 몇 개의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법을 잘 안 지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첫째, 법이 수시로 만들어 지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법도 정비가 안되고 섞여 있습니다. 누더기 법이다 보니 치명적으로 지켜야 하는 법도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어떤 법은 고무줄과 같아서 눈을 감아주느냐 아니냐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특권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 더 중요한 사실은 '현실 따로, 법 따로'의 세상을 살아 오다 보니 법의 권위랄까 하는 것이 심히 뭉개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로 인한 피해자는 바로 국민들이며 크고 작은 각종 안전 사고의 희생자들입니다.
법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일은 위정자들의 몫입니다.
호주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속도제한이 90 킬로에서 60킬로로 바뀔 때마다 자로 잰 듯 모든 차량이 일제히 감속과 가속을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동승한 현지인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운전자가 인정할 만큼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감속 표지를 달아 놓는다는 점, 그리고 위반 시에는 반드시 딱지가 발부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월 오일 어린이날을 또 한번 오열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안내방송의 말을 듣고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키다가 죽음을 당한 학생들이 그저 "바보"로 죽게 놔 두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지키면 바보가 되는 고무줄 법에 종지부를 찍어달라는 간절한 호소를 이들은 목숨을 바쳐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법을 만들며 집행하는 위정자들의 의무와 책임도 신랄하게 짚어 볼 때가 되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새 도정이라도 전국적으로 모범이 되는 변화를 보여 줄 것을 주문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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