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전 제주도기자협회장

 

몇 년전 경상도 지역에서 회식을 하고 끝날 때면 참석자들이 합창하며 외쳐댄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술잔을 들고 “우리가 남이가?” 의리로 뭉치자“- 그것이다.
그냥 무심코 들어보면 별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말뜻을 음미해보면 오싹해지는 느낌도 든다. 우리끼리는 남도 아니요, 오로지 한 배를 탄 같은 조직이란 말이다. 우리끼리는 형제나 마찬가지요,남이 감히 우리의 범위에 들어오거나 넘나볼 수 없다는 배타적 의미가 녹녹하게 깔려있다.
우리사전에서 ‘의리’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좋은 의미의 의리가 어찌된 일인지 변색되고 있다.

폭력조직에서의 의리, 특정 집단이나 특정사회에서 자기파의 이익만 쫓기 위해 똘똘 뭉친 의리…
이런 변색된 (나쁜) 의리 사회에선 정상적인 모습이나 합리성이 설 자리가 없다. 비정상의 행태와 함께 그들 끼리끼리의 정(情)과 탐욕만이 지배한다.
월드컵에서 최하위 성적을 낸 우리나라 대표 팀을 놓고 국민적 실망감이 크다. 패배원인이 ‘의리 축구’ 때문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홍명보 감독과 같이했던 선수들이 브라질 월드컵 엔트리에 대거 이름을 올려놔 그들만의 무대로 경기를 이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엔트리 23명 가운데 런던 올림픽의 주역, 흔히 말하는 ‘홍명보의 아이’들은 무려 12명이나 됐다.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김영권 정성룡 등 올림픽 베스트 11명 가운데 10명이 모두 뽑혔다.

여기에 부상으로 올림픽에 가지 못한 홍정호와 한국영, 그리고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홍명보호에 합류했던 김승규까지 포함하면 ‘홍명보호의 아이’들은 23명중 15명이나 된다고 김현희 전 스포츠서울 닷컴 기자는 지적한다. 누가봐도 ‘인맥축구’의 진수다.

그러나 상표와 등급을 모두 숨기고 평가하는 ‘블라인드 테스트’ 축구가 있었더라면 홍명보의 아이들은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한국영과 김승규 기성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준미달이다. 아예 대표팀의 새판을 짜야할 수준이었다. 여기에다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니었던 김신욱과 이근호, 손흥민이 비교적 훨훨 나는 모습에 더욱 어이가 없어보였다.

1승도 못하고 월드컵에서 탈락한 것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이후 실로 16년 만이다.
결국 이번 대표팀은 런던 올림픽을 계기로 오래전부터 맺어온 홍명보와 그의 아이들과의 끈끈한 관계,-‘의리축구’의 비참한 결과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 팀을 4강으로 올려놓은 히딩크의 엔트리 선발과정과 너무나 대비된다. 히딩크는 우리나라 축구계의 고질병인 파벌, 학연. 지연, 그리고 경기대회연(緣)등을 깡그리 무시한채 ‘블라인드 테스트’로 오직 실력 하나만을 보고 선수들을 뽑았다. 무명의 이을용 박지성 설기현도 이 때 뽑았다. 히딩크의 엔트리 선발에 인맥은 원초적으로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의리는 원래 좋은 뜻이었다. 나쁜 의리가 있어 문제다. 좋은 의리는 온정과 신뢰와 합리성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든다. 나쁜 의리는 국가와 사회를 좀먹고 퇴보시킨다.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 세한도(歲寒圖)에는 강한 의리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된 추사가 1840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자 문전성시를 이루던 지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러나 제자인 통역관 이상적만은 의리를 지켰다. 그는 추사에게 귀한 중국 책자를 어렵게 구해 전해주며 외로운 스승의 창작욕구를 채워주었다. 추사는 그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 선물했다. 그림의 발문에 공자의 시 한 구절을 적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글씨를 쓰면서 감정을 추스렸을 추사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원희룡 신임 제주도정의 인사를 놓고서도 벌써 일부에서 의리문제가 고개를 든다. 앞으로 원지사가 실시할 공무원 인사, 그리고 각종 단체장, 공공기관장의 인선에는 좋은 의리만 작용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