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장마가 걷히는 듯하면서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수국꽃이 만발하고 담벼락 너머로 옥수수대가 넘어오기 시작하면 “여름이구나!”싶어진다. 여름, 이름이 참 예쁘다. 여름, 여름…자꾸 되뇌이다보니 여름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진다. 어원사전을 찾아보니, 여름(夏)은 “계절의 중심으로 ‘열매(實)를 맺는 때’를 일컫는다고 한다. (녀름 = 여름果:訓蒙), 즉 농사짓는 일을 ‘녀름 = 여름지이’라고 했단다. ‘여물다’, ‘여미다(옷깃을)’, ‘엮다’의 말에서 파생된 말로써 유추하자면, 여름내 햇빛을 받은 온누리의 생명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다. 그러니 여름이야말로 계절 중에 가장 풍성한 열매를 안겨다주는 계절인 셈이다.

온 천지가 열매를 맺고 있다. 어머니댁 우영팥에 심어둔 고추, 오이, 물외, 가지, 호박, 콩이 무럭무럭 익어가고 있다. 싱싱한 물외를 따서 냉국이나 만들어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입맛은 절대적으로 어린 시절에 길러진다고 한다.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 입맛 없다고 불만 섞인 말을 하면 어머니는 우영팥으로 달려가서 물외나 콩잎을 뜯어오셨다. 금방 따온 물외를 어슷 썰어 냉국을 만들어주셨다. 작은 항아리 단지에서는 자리젓을 꺼내 고추 송송 썰어 콩잎에 싸먹어보라고 하셨는데, 그때 익은 입맛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더운 여름날은 된장 풀어만든 물외냉국 한 그릇에, 콩잎에 자리젓을 싸먹으면 사라졌던 입맛도 금방 돌아올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면 웃겠지만 말이다.

요즘처럼 먹을거리가 변변찮은 시절에는 쌈밥을 많이 해먹었다. 콩잎쌈, 상추쌈, 호박잎쌈 등 아주 손쉽게 해먹었던 음식인데 이젠 별미라 칭하게 되었으니 참 별일이다. 예전에는 흔하게 먹던 음식인데 말이다. 무더위를 식히는 먹거리 중에는 연잎밥도 있다. 사찰음식라고 알려지긴 했지만 요즘은 여느 집에서나 별식으로 해먹는 것 같다. 미리 찐 찰밥에 연잎을 깔아 잣이나 고구마 같은 것을 넣어 찌면 연잎밥이 된다. 생각보다 번거롭지 않고 오색이 곱게 물든 연잎밥을 먹노라면 잘 차려먹은 듯한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다. 생각난 김에 조만간 연잎밥 만찬을 준비해 먹어 봐야겠다. 여름 보양식으로. 

연잎밥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연꽃이 한창이다. 제주도에서는 연꽃을 보려면 하가연못으로 가보는 게 좋다. 지난 주말 들렀는데, 연못 가득 채운 푸른 연잎 사이로 연꽃봉오리들이 새색시볼마냥 발그레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가연못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연못 주변을 한바퀴 휘 돌면서 연꽃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아슬아슬 버드나무 사이를 지나 육각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예쁜 시·사진도 볼만하다. 제주젊은시조문학회 회원들이 하가연못을 배경으로 쓴 시들을 사진과 함께 전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인들의 눈에 비친 하가연못은 어떤 모습일까? 연꽃의 미소를 보며 유혹에 현혹되지 말라는 지혜의 말을 듣기도 하고, 먼 곳에서 하늘이 되레 연꽃으로부터 처염상정의 언어를 듣고 있다는 재치있는 시선도 엿보인다. 하나같이 귀한 말씀을 전하는 듯, 물빛어린 순수를 전하는 듯,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의 손등을 쓰다듬는 듯 따뜻하다. 꽃과 시, 바람이 하가연못에 함께 머물고 있다.

여름, 여물게 하는 계절이다. 덥다고, 귀찮다고 에어컨 바람 속으로 칩거하지 말고 살아있는 것들을 만나보자. 잃어가는 입맛은 우영팥에서 뜯은 야채쌈밥으로 돋구고, 생기는 꽃과 시, 바람과 함께 걸으면서 얻는 게 어떨까. 몸도 챙기고, 마음도 챙기고. 그러면 올여름은 거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