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성 논설위원

어떤 선배가 은밀하게 말했다. 70대까지는 내일이 보였는데 80을 넘어서니 별로 내일이 안 보인다고.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이든 이들이 나름대로 한평생을 정리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나싶다.

돈을 좀 모은 친구들은 자녀들에게 넉넉하게 재산을 물려줬다는 말들이 꽃 피어난다.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장일홍 희곡작가가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일이다. 그가 크게 보인다. 고작 나는 50평짜리 빌라를 20평대 임대아파트로 바꾸고 책은 5백 권 정도, 입던 옷과 세간도 간단히 줄이는 일들을 하려 하는 것이 말년을 정리하는 일로 삼고 있다. 부끄럽다.

아내가 많이 아프다. 나도 대학병원에서 2년 전에 했던 요추 수술이 영 신통찮아 병자 신세를 못 면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친구가 최고다. 친한 친구가 세상을 뜨거나, 아내와 사별하거나, 병을 앓고 있거나, 잔병 하나 둘은 거느리고 여행을 다니거나 산을 타거나 골프를 치거나 하는 모습이 생각만 해도 눈물에 젖어 올 때가 있다. 올 봄부터 병원 가까운 일산에 몸 둘 집을 구해 병원을 오가며 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제주와 일산을 오갈 생각을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런데 뜬금없이 서울, 경기 쪽에 살고 있는 일중3회 동창 친구들 모임에 나올 수 없겠느냐고 회장을 맡아 수고하는 김동현(아파트 리모뎅링 업체인 D&C design Co.Ltd 공동대표 )의 전화를 받았다. 서로 만나 본지도 이삼십 년이 더 되었다는 얘기다. 한국항공대 명예교수인 이봉준이 점심을 대접하고 정담이나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다.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그날, 무료전철을 한 번 갈아타고 옛 친구들을 만나러갔다. 아직 살아있는 친구들이 23명이나 된다고 했다. 우리는 웃었다. 세월에 주름진 손들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중학생 때 웃던 그 티 없는 웃음을 우리는 웃었다. 즐거웠다.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인사는 간단했다. 안 변하긴. 중학교 졸업해서 60년도 더 지났는데. 그런데 그 60년이 어제같이 느껴졌다. 별일도 없었는데 그냥 즐거웠다.

그날 만난 친구들은 강창언(연세대 명예교수), 김남수(전 마포경찰서과장), 김묵현(전 삼환엔지니어링 대표), 김영훈(전 모토롤라 한국법인장), 김용해(한국학술원 회원, 제주대 석좌교수), 문병훈(전 육군 중령), 부수언(서울대 미대 명예교수), 송근원(전 육군본부 인사과장), 양경욱(전 대법원 서기관), 강덕황(전 국세청 기획관리실장), 이봉준 등 11명. 강승삼(전남대 명예교수), 양융(연세대 명예교수), 오명호(전 육군 대령)는 못 만났다. 9월엔 온양에서 만난다고 한다. 그때도 연락할 테니 만나잔다. 격의 없이 친구로 나를 반겨주는 옛 벗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제 팔순고개를 눈앞에 둔 우리. 친구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친구가 죽었다 해도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그리움이다. 고남욱(제주대 명예교수)이 별세한 지 두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

문득 생택스의 『어린왕자』생각이 난다. 대학 교양불어 텍스트(중급과정)로 이 동화집을 선택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단어를 외우고 문법에 매달려 이 아름다운 동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았다. 그게 불만이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비밀로 일러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마음으로 보아야한다’ 든 가, ‘길들인다’는 의미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은 그리움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끈이 된다.

너와 나의 관계가 이룩된다. 그 관계 맺음이 우리 삶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우정은 그래서  우리 삶의 소중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