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경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새벽부터 벨이 울리는 것은 어김없이 친정엄마의 전화다.

어쩌다가 필자는 당신 전화의 단축번호 일번이 돼버렸다. 여든 고개에 들어서신 후엔 전에 물으셨던 것을 잊으시고 다시 묻는 기억 능력의 퇴화로 전화벨이 부쩍 더 바빠진 것이다.

그 시간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전화에다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라는 발신자는, 마치 뱃사람들을 유혹하여 배를 난파시켰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새벽잠의 장밋빛 꿈결을 타고 가던 필자의 귓전에 속삭이듯 들리는 것이다. 영락없이 꿀잠은 난파되고 말지만, 그래도 ‘엄마’와의 통화 후엔 엄마젖을 실컷 먹고 난 후의 생기 가득한 아기처럼 새벽이슬 같은 미소를 머금고 “좋은 아침!”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이런 차별적인 반응이 부조리하다며 “당신에게 엄마란?” 하고 누가 따져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울대에 힘을 주며 ‘팔월愛’라 할 것이다.

워낙 하수선한 시대 탓일까. 누군가는 ‘엄마’라 하니까 유병언의 용맹무쌍한 호위대였던 ‘신엄마’나 ‘김엄마‘, 그리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단식농성 중인 곳을 찾아가 어이없는 소란을 피웠던 ‘엄마부대 봉사단’의 ‘엄마’들을 떠 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부터 나만의 ‘엄마’, ‘팔월愛’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아스팔트를 펄펄 끓게 하는 팔월이 산달이니 온돌식 산후조리가 얼마나 고역이셨을까. 엄마는 팔삭도 못 채웠는지 나를 낳고 보니 비쩍 말라 멸치 가시만 남은 꼴이셨다고 한다. 그 동안 이 어린 것에 대한 연민과 걱정은 당신의 깊은 속으로만 삭혀 지내셨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은 후에도 당신에게 속치마라도 남에게 보일까 수줍던 처녀시절은 언제였는지 이 어린 것이 젖 달라고 조르면 때와 장소가 구별이 안 됐단다. 시장통 한 가운데 무수한 시선이 꽂힌다한들 가슴속살을 다 드러내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게 당신에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소녀 시절에는 개구리 시체만 봐도 까무러치곤 했다는 당신은 엄마가 되고 나선 개구리 몸집의 열 배도 넘는 바다생선의 배를 갈라 손에 피를 묻혀가며 내장을 꺼내고 토막 내는 험한 일도 서슴지 않으셨다.

맛있는 생선국을 끓여 주시는 게 이 못난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서. 철없던 시절 샘이 많았던 나는 빈한한 살림 형편에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저만 예쁜 옷을 사달라고 밤새 울며불며 엄마를 졸랐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즐겨 입으시던 낡은 와이셔츠가 반짝반짝 빛나는 새하얀 스탠카라 원피스로 만들어져 내 머리 맡에 걸려있었다.

‘엄마’가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 어느 누가 오롯이 나를 위해, 남들 앞에서 창피함을 모르고 맨살을 보이겠는가. 혹은 험한 일을 마다 않고 고운 손에 피비린내를 묻히겠는가. 아니면 딸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꼬박 밤을 새워가며 전지전능의 신통력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려고 했겠는가. 

‘팔월愛’는 그런 거다. ‘엄마’란 세상의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품으로 달려가 일러바치고 싶은 존재다. ‘엄마’는 회초리를 들어도 차마 어린 자식의 종아리는 못 때리고 눈물만 글썽거리다 와락 끌어 안아주시기라도 한다면 우리들의 잘못과 설움이 어느새 구름처럼 가벼워지는 마술이다.

한나절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보려고 끝없이 펼쳐진 팔월의 푸른 바다를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에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당신이 나를 위해 흘린 슬픔을 담으려는 듯 딥블루의 물빛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바다는 다시 밝은 울새 알 색깔의 티파니 블루로 반짝거린다. 당신께 흘려야하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일까. 문득,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행복이 포말처럼 가슴 깊이 퍼지더니 그동안 가슴 속에 그득했던 갑갑함과 고단함이 탄식처럼 쏟아져 나온다.

돌아오는 생일엔 엄마를 모시고 한 번 더 나와야겠다. 그 땐 내가 엄마가 되고 내 엄마는 아이가 되시겠지. 당신이 물이 차다고 응석을 부리면 발만이라도 담그고 조개껍질 주우며 모래장난이라도 하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