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김광렬.

 

구상나무는 한라산 1500고지에서 1900고지 일대에 걸쳐 대거 군락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의 제주도, 지리산 노고단 임걸령, 전라북도 덕유산 등지에서만 자라는 희귀종 교목이라 한다. 침엽(針葉)이 모여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형상을 띠고 있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으면서 연초록 해맑은 인상을 준다.

나는 지금 한라산 중턱 어느 언저리쯤에서 구상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생(生)과 사(死), 어떤 나무들은 푸름을 간직하고 어떤 나무들은 죽어가거나 죽어 있다. 얼마 전 관계기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한라산의 약 45% 정도의 구상나무가 고사했다고 한다.

죽음에로의 이동은 앞으로 더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사인은 뚜렷치 않다. 폭설을 원인으로 보는가 하면, 기후 및 환경 조건의 변화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그 나무들 가운데 지금 나는 한 나무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몽글몽글한 잎도 가지도 껍질도 이미 몸을 떠난 지 오래다. 삐쩍 말라붙은 허연 몰골이지만 그 자태만은 고고하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찬사 한 마디씩 던지며 간다. 참 아름답게 늙어간다고.

그렇다. 저렇게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을까. 추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볼썽사납다고 외면하거나, 무언가 멀리 하기는 미안하고 가까이 하기는 싫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스쳐지나버릴 텐데 저 나무는 왠지 자꾸만 눈길이 간다.

고상하고 기품 있는 자태가 보통이 아니다. 인생의 오욕칠정을 두루 겪고 비로소 어지러운 세속의 간난고초에서 초탈한 군자처럼 멋스럽다.

나는 때로 내 인생의 말년을 상상한다. 추한 모습은 아닐까, 혐오스러운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스러지면 그만이지만, 또 인생은 맑고 깊숙한 눈동자를 지닌 저 하늘의 별이거나 티끌 한 점 없는 이슬방울이거나 솔잎의 깔끔하면서 담백한 향기처럼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소쇄한 바람이 머리를 빗질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아니, 바가지로 욕 얻어먹지나 않으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조금씩 삶을 다듬어나가야 하는데, 그래서 저 나무처럼 멋있게, 기품 있게, 고독하게 늙어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은 욕망으로 부글거리는 삶을 살라고 유혹한다. 높은 지위에 오르라고, 좋은 집에서 살라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라고, 명품 옷을 사 입으라고 풀무질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귀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물질의 양은 유한하다. 그 물질의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는 존재는 극소수인데 반해, 대부분은 보통 정도의 물질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빈곤에 허덕인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물질의 인위적 공동소유나 공동분배를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욕심의 과잉을 스스로 제어하는 슬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많은 재물을 축적한 어느 한 사람이 그것을 다 잃고 난 뒤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다한다.

내가 필요이상으로 소유하려 했을 때 의도하든 않든 약자를 괴롭히거나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 엄청난 재물을 손아귀에 거머쥘 수 없는 거라고. 지금은 그게 후회스럽다고.

정말 욕심만 앞세우다보면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올지 모른다. 그것은 비단 물질세계뿐만 아니다.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다. 보다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소통하는 마음으로 문제 접근을 해나간다면 저 구상나무처럼 고결하고 기품 있는 삶을 마감할 수 있잖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