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렬 시인.

 

사람만이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눈 위에 드리워진 나무그림자와 나무는 두 몸이면서 한 몸이다. 같은 생각을 할까, 다른 생각을 할까. 우리 내면의 두 개의 자아처럼 분리된 나가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고 합일하기도 하는, 그런 사고를 나무도 가졌을까?

한라산에 올라 나는 나무그림자를 바라본다. 물론 한라산이라는 특정 공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눈 위에서 나무그림자의 형상이 도드라지므로 그곳에서 나무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누구일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아무 목적의식 없이 자고 일어나고 꾸역꾸역 세끼 밥 챙기면서 산다고 다 살아가는 것인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나의 내면에도 꿈틀거리는 그 무엇은 있는 것인가. 누구에게 밟혀 보기라도 한 것인가. 억울하다고 허공에다 종주먹이라도 날려본 적 있는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도 했을 것이다.

제풀에 지쳐 주저앉으며 울분을 삭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건너왔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시간은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위무하면서. 

그렇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인생이 물속처럼 더 깊어질 만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살짝 얼다만 살얼음처럼 얇아져가고 있으니 그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어수선해서인가. 세상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자꾸 나에게 너는 그냥 그림자로나 살아가라고 우격다짐해서 그런가. 나는 고작 그림자에 불과한가. 그저 예, 예 복종하면서 사는 게 능사인가.

그림자는 그림자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나무가 되지 못하는가. 그림자가 없으면 나무도 존재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 그런데도 이 세상은 마치 나무만 생존하면 된다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것 같다.

언젠가 TV를 통하여 강정의 어떤 상황을 본 적이 있다. 해군기지가 건설 중인 강정바닷가로 가는 어귀 어느 지점일 것이다.

오랜 투쟁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그런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수녀님이 의자에 앉은 채 강정해군기지 반대성명서를 읽고 있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때 관계기관에서 나온 두 사람이 느닷없이 양쪽에서 의자를 번쩍 들더니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저항행위를 억제하는 강한 의사표현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수로울 것 없는 그 행위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물론 그 정도는 약과에 불과한지 모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퍼뜩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저 수녀님은 과연 이 땅의 나무일까, 아니면 나무그림자일까 하는 생각. 약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무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무그림자이다. 허나, 그것은 그냥 묵언수행 중인 나무그림자가 아니라 무언가 표현하고 실천하는 나무그림자다.

나는 여기서 강정해군기지에 대해서 찬반론을 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면 충분한 설득이 필요한데도 그것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성을 발휘하는 것, 억압에 의해 목적을 이루려는 그 태도가, 그 마음가짐이 아무래도 불안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 약자는 그저 그림자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그저 온순하게 있으면 그나마 괜찮고 역행하면 괘씸한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 속에서 이 땅의 그림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바쳐 불꽃처럼 생업에 종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