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기철 시인

 

아침에 일어나니 눈 세상이다. 눈은 앞의 노루손이오름에도 소나무밭에도 좀 두껍게 쌓였다.

명도암에서 봉개동 큰길까지는 내리막길이 한동안 이어지는데, 오늘 같은 날이 일 년에 몇 번 있다.

이런 날은 차 운전이 힘들어 아내는 버스로 가잔다. 난 아직 이 평화로운 마을에 하루 종일 혼자 있기에 적응이 안 돼 매일 시내로 나간다.

아내는 아직 정년 이전이다. 절물휴양림에서 출발한 버스가 43평화공원을 거쳐 차 소리들 붕붕 울리는 큰길로 내려간다.

다시 조용한 길로 접어들어 도련을 지나니 삼양 검은모래해변의 아치가 보인다. 다시 차들이 붕붕대고 사람들이 많다. 화북을 지나 동문로로 접어든다. 눈바람이 갑자기 몰아친다.

일찍 버스를 타서 평소보다 한 시간 빠르다. 난 동문로 풍경을 보기 위해 차에서 내린다.

1930년대 박태원은 소설 ‘천변풍경’이나, 난 ‘동문로 풍경’이다.

제주시 원도심은 지금 한창 수선을 하느라 들떠 있다. 내가 내린 동문 로터리도 차도에 인도 블럭을 넓게 깔고 있다.

예전에 청춘들의 장소였던 동양극장은 시네하우스를 거쳐 이젠 건물만 남았다. 저쪽 산지천은 탐라문화광장을 만든다고 애써 만든 걸 허물고 있다.

동문시장도 칠성로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짝반짝, 번쩍번쩍.

이런 와중에도 동문로는 쓸쓸하다. 동문로는 한번 제대로 주목 받아 본 적이 없다. 동문 로터리에서 올려다보면 길이 곧 꺾여 모습을 감춰 버린다.

동문로는 그냥 수줍게 숨어 있어 이 근처에 온 길손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 그런지 동문로의 건물들은 눈 밖에 난 아이처럼 풀이 죽고 꽤재재하다.

세찬 눈발을 막으며 조금 올라가다 보니, 옆에 오래 전 이발소 풍경이 나타난다. ‘내고향이용원’. 안을 들여다보니 수십 년 전 이발소 풍경 그대로이다. ‘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모범업소, 이발, 친절봉사, 기술본위’, ‘5년 젊어지는 이발소’라고 쓰여 있다.

그 옆은 ‘비원다방’. 안이 잘 안 보이지만, 옛날식 다방이 틀림없다. ‘정은헤어샆’, ‘온동네식당’, ‘고개마루소주방’이 1층에 있다. 2층을 보니 실내포장마차 집과 ‘ㅎ예술단’인데, 거기 벗겨지고 흐린 창에 ‘제주민요’, ‘경기민요’, ‘장고’, ‘고전무용’에다 ‘경로잔치’, ‘야유회’, ‘집들이’라고 쓰여 있다. 건물 벽은 노란 페인트가 벗겨지고 때가 많이 묻었다. 좀 떨어져서 보니 영락없는 6,70년대 모습이다.

그 시절엔 이래도 됐겠다. 젊은 남녀가 각각 정은헤어샾과 내고향이용원에서 머리를 하고, 비원다방에서 만나, 온동네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고개마루소주방에 가 분위기를 돋우면 됐겠다.

나는 죽 올라가 고등학교 졸업 후 기웃거렸던,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어느 집 앞으로도 가 본다. 그 집은 사라지고 주위도 무척 변했다.

제주동초등학교 주위엔 크고 작은 아이들이 외투를 입고 종종 걸음으로 예전처럼 학교로 가고 있다. 거기 잠깐의 내 유년도 있고, 그 아이를 데려온 젊은 엄마도 있다. 잠깐 울컥한다.

제주여상 정문 옆 오래된 테이프와 CD를 파는 자그만 가게 ‘전람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돌아 내려오며 보니, 용다방, 양지다방도 있어 동네 아줌마 같은 마담이 계란 노른자를 푼 모닝커피를 들고 와 늙수그레한 손님 곁에 앉아 있을 것 같다.

군산의 어느 오래된 사진관을 배경으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었듯 이 건물을 배경으로 영화도 만들 수 있겠다. 거기 미장원도, 이용원도, 다방도, 술집도 다 있으니까. 문득 박고석의 그림 ‘범일동 풍경’(1951)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