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공간을 기록한다면 음악은 시간을 기록한다. 그런 까닭에 음악은 추억을 재생하는 힘이 세다. 놀러와의 ‘세시봉 특집’과 무한도전의 ‘토토가 특집’을 보며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가 ‘동시대 앓이’를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노래는 지나온 한 철을 현재로 소환해 짧은 시간동안 그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마셜 버먼 저작 ‘현대성의 경험’의 한 구절이다. 우리가 어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더라도 나는 ‘나’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볼 수 없다. 현재의 나는 경험 이후 ‘기록’이라는 회상의 방식을 통해 만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진이나 그림, 음악에 매료되는 까닭은 풍경 속에 있는 나를 다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권나무 정규 1집 '그림'

음악을 듣는다는 건 풍경 속에 있는

나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시간

여기 대기 속에 녹아버리는 것들의 안타까움을 견고하게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 그저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던 그는 하나씩 알수록 더 먼지가 쌓이고 또 털어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는 반복되는 우리의 삶 앞에서 그는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기가 그 어떤 것들보다 쉬웠던 시절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고 해가 질 때까지 같이 놀자하는 권나무(30). 최근 제주시 이도동에 소재한 ‘엘리어스 체어’를 찾은 그를 만났다. 이번 방문은 첫 번째 정규앨범 ‘그림’ 발매 기념 전국투어로, 공연을 위해 제주를 찾은 건 지난 여름에 이어 두 번째다.

“제주는 참 특별한 곳인 것 같아요. 아름답잖아요. 누가 불러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제주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서 지난 여름에 왔었는데, 너무 좋은 경험이어서 이번 전국투어에 제주를 넣었어요. 제주는 저를 설레게 해요.”

떨리는 호흡을 애써 감추는 법 없이 날것의 상태로 ‘정성스럽게’ 공연을 마친 권나무. 그는 음악을 들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쾌활했다.

“요가를 배우고 있어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지거든요. 근데 제주 공연 때문에 새해 첫날부터 요가 배우러 못 갈 것 같아요.”

▲ 기교 없는 마음의 결을 따라 자라다 보니 초봄의 나무가 됐다.

사라진 것들과 다가올 것들 사이에서

비밀을 간직하다

권나무는 교사인 어머니와 군인인 아버지 슬하에서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14번의 이사와 9번의 전학을 경험했다. 어린 시절 유목의 영향인지 그의 음악은 뿌리 없는 바람처럼 불어오다 불안의 정서를 흔든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그는 좀 더 ‘진짜인 시간’을 그리고 싶어서 노래하는 낯선 삶으로 떠나기로 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밴드생활을 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그렇지만 뭐가 돼야지 한 적은 없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연스럽게 음악이 제 삶이 되어 있었죠. 음악을 하기 전에는 골방에서 많이 고독했어요. 소중한 것들, 중요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독한 삶보다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비밀을 간직해야 삶이 다채로워지죠.”

그에게 비밀은 음악이다. 음악을 간직했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지도, 잊지도 않을 수 있었다. 소중한 것들이 많아서 그는 사람들이 다 기억 못하고, 상실하고, 스러지는 것들에 대해 노래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다 기억 못하고/ 마음 주던 사람도 자꾸만 변하고/ 노래하던 사람도 이제는 떠나고/ 자주 가던 가게도 저 언덕 너머로 <정규 1집 ‘내 탓은 아니야’ 중>

▲ 지난 3일 제주시 이도 2동에 소재한 엘리엇스 체어에서 노래하고 있는 권나무.

처음에는 겨울나무

이제 싹이 움트다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듯 현재는 빠르게 과거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이란 영원히 경험 불가능한 그리움의 시간이다. 그렇다고 권나무의 노래는 채우면 사라지고, 자랄수록 막막해지는 세상을 허무하다 탓하지 않는다. 단지 아직 붙잡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소박해서 마음에 더 큰 자장이 일으킨다.

그는 내일만 생각하고 살다가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도, 세상이 지운 빚을 갚다 자신의 빛을 잃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머리위로 켜켜이 쌓아가며 지금 이 순간을 솔직하고 정직한 실존으로 꾸려가기를 바랄 뿐이다.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어린 묘목은 이젠 무엇인지 모를 차분한 것들이 불안의 빈틈을 메우는 서른이 됐다.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외롭다 쉽게 말하지 않는 뮤지션이기도 한 그는 어떠한 의도나 목적도 없이 기교 없는 마음의 결을 따라 자라다 보니 초봄의 나무가 됐단다.

앨범 타이틀인 '어릴 때'가  2014 올해의 노래 5위에 뽑혔다. 1위부터 4위까지 소유, 태양 같은 메이저 가수들의 노래가 순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형 레이블에 속하지 않은 권나무의 노래가 선정됐다는 건 의미가 크다. 그는 자신의 첫 앨범에 대해 “저의 음악을 듣는 분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저마다의 '그림'을 그려 보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붓의 흔적들로 시간의 더께까지 노래하고 싶다는 권나무. 그의 새해 소망은 소박한 듯 거대하다.

“지난해는 너무 아픈 일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따뜻해 질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똑똑함 속에서 냉정해진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올해는 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간과, 따뜻한 마음들로 채워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사랑 뿐인 것 같아요. 제주에 계신 분들이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사랑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