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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석교/시인 |
프랑스의 의사·생물학자 앙리 라보리는 『도피 예찬』이란 저서를 통해 인간이 시련에 부딪힐 때 선택하는 세 가지 반응을 얘기한다. ‘시련에 대한 맞대응, 시련에 대한 무대응, 시련으로부터의 도피’가 그것이다. 저자는 「도피」에 주목하여 다음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시련으로부터의 ‘화학적 도피’. 술·담배·약물 같은 화학물질을 통해 잠시 시련을 잊는 방법이다. 다음은 사람, 장소 등을 피해 다니는 ‘지리적 도피’.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가끔 권장할 만하다. 끝으로 ‘예술적 도피’. 바람직하다고 추천되는 방법이다. 시련을 예술적 창조로 승화시키거나 예술작품 감상을 통해 상상속의 주인공이 대신 해원토록 하는 것이다.
4월은 상처 입은 제주도민들에게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의 계절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개인의 실체적 사례를 통해 4·3유족과 제주도민들을 지배하는 집단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고 지독한 것인지, 그리고 시련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지를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초등학생 때 몇 살 터울 형한테 당한 폭력 때문에 장년이 된 지금도 잠결에 깜짝깜짝 가위눌린다. 어머니 말을 안 들었다는 이유로 크게 맞아 일주일을 학교도 못간 채 앓아누웠다. 맞기 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겁똥까지 지렸다고 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도 성장하고 그의 아들들은 대학생이 된다. 어느 해 추석, 차례를 지내고 음복하던 도중 그는 가까운 한 친척의 부도덕한 과거를 들춘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또 형에게 주먹질을 당한다.
그는 형으로부터의 직간접적인 많은 시련에서 벗어나고자 본능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해소되지 않는다. 사실 그에게 필요한 건 형의 진정어린 위로 한 마디뿐이었다. 그러나 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찍 작고한 아버지를 대신한 형은 그에게 거대한 절벽이었다. 그로 인해 결국 그의 내면세계는 공포, 분노, 수치, 우울, 절망, 자괴심, 피해망상증 같은 부정적·극단적 감정들로 채워져 버린다.
4·3으로 돌아와서,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해본다. 학살, 실종, 부상, 옥살이, 밀항, 연좌제, 불명예 등 온갖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온 4·3유족들의 트라우마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폭력에 오래 노출된 한 개인의 인생이 저렇게 굴곡졌는데, 국가가 국민을 가해한 깊고도 질긴 집단적 상처는 과연 풀릴 수 있을까?
가해자들의 문제는 자신의 과오를 절대 인정도, 반성도, 사과도, 위로도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현재 4·3이 처한 문제도 전임 대통령의 사과를 후임 대통령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국민의 아픔을 정부가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건 ‘국민대통합’과도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화해·상생을 원하는 제주도민들을 정부가 외면하는 한 정부와 제주도민의 관계는 갑과 을일 수밖에 없다. 약자인 을이 먼저 화해·상생을 부르짖는 건 별 의미가 없는 노고일지도 모른다. 강자인 정부가 국민대화합을 위해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순리이다. 정권의 성격이 바뀐다고 해서 역사의 사실관계마저 뒤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4·3 67주년이 코앞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진영 논리를 떠나 온 국민을 품어 안아야 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국민대통합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뼈에 사무친 4·3의 아픔을 헤아려야 한다. 용서·화해·상생·평화를 위해 진심으로 도민을 위로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 위로와 배려의 방법이 바로 제주도민들이 바라는 4·3위령제 참석이다. 불편한 관계였던 4·3유족회와 재향경우회도 어둠의 트라우마에 갇혀 수십 년 간 전개해 온 케케묵은 사상 논쟁과 이념 갈등을 저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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