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전화 창시자인 앨런 워커(Alan Walker)에 의하면 ‘생명의 전화’의 탄생은 실의와 고민 끝에 자살하기 직전의 한 젊은이가 걸어온 전화 때문이었다.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역작은 미세한 인간의 고통 소리에 귀 기울여 들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목사가 심야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를 재발견한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대중매체로 보편화되어 현대인이 즐겨 쓰고 있는 '전화'앞에다 '생명의'라는 소유격을 부쳐준 '생명의 전화는 현대의 문화적 편의성과 생명의 가치를 다이나믹하게 연결시킨 생동하는 표현이다.
전화가 가지고 있는 편의성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첫째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킨 즉시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면 걸 수 있다는 즉시성은 전화가 가지고 있는 우선적인 장점이다. 둘째로 익명성이다. 선별적인 인간관계는 자기개방보다는 자기방어를 앞세우게 되고 부담감이 없는 한도 내에서만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 전화는 이러한 자기방어와 선별적인 인간관계의 두터운 문을 부담 없이 뚫을 수 있는 익명성의 무기를 제공해 준다.
셋째로 보편성이다. 특히 상담이라는 스펙트럼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의 정신적인 내면구조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프로이드 이래 상담적 치료를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서 활발하게 전개된 그룹치료와 예방치료는 인간의 성장을 도모해서 누구나 정신적 치료술의 혜택을 골고루 받도록 하게 하려는 시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러 가지 보편화에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상담은 서구사람들에게조차 중산층 이상의 특수집단에 대한 치료라는 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화는 지식의 유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문명의 이기이기 때문에 전화를 통한 상담은 보편화 내지 대중화를 가속시켰다.
이러한 전화의 편의성 때문에 생명의 전화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는 60년대 초기의 조국근대화의 망치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변화의 가속화가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대가족제도 속에서 자라난 세대들이 하루아침에 중개자 없이 대결하는 남편과 아내 곧 아파트 핵가족으로 변모했다. 국가와 가정이라는 극대와 극소의 틈바구니에서 살던 전통적인 의식구조가 중간공동체에서 생겨나는 문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대결의 현실보다는 대결문화(encounter culture)를 처리할 수 있는 사전훈련이 없는 것이다. 훈련 없이 대결현장에 나타날 때에 쉽게 나타나는 현상은 부서지고 깨지는 절망과 위기의 아픔이다. 이 절망과 위기의 아픔이 적절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누적되면 외형적으로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내면적으로는 자살의 충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대결의 충격 속에서 오는 아픔과 슬픔을 전화를 통해서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주변사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내향적인 수줍음으로 다져진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적절한 돌파구가 되는 것이다. 상담에 의한 치료가 내향적인 자기 보호막 때문에 서구문화권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문화적인 여건 속에서 생명의 전화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착상이기 전에 한국인이 기다리고 바라던 대화의 통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명의 전화는 한국인의 정신적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표현방법을 적극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잉태된 아기가 태어나듯 사회변화에 따른 인간적 요청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