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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3일, 수요일이었다.
평소 매주 수요일이면 실내에서 하던 시창작수업을 야외에서 하자는 수강생들의 성화에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감악산으로 야외수업을 갔다. 지난 가을,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옆에 있는 하늘공원 억새축제에 간 이후 5개월만의 야외수업이다. 칠순이 넘으신 분, 육학년의 중반에 든 몇 분, 그리고 대부분 오십대가 넘은 학생들이다. 연세 드신 수강생들인데도 소풍가자면 더 좋아하니, 노는 데는 남녀노소가 없는 모양이다. 호수에 비치는 물비늘이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처럼 보인다. 느티나무는 겨울을 수백 번 나고도 또 봄이 그리운지 까치발을 들고 우리를 마중한다. 바위도 입맛을 다시느라 얼음 침을 흘린다.
시에는 꼭 애국심이 들어 있을 필요도 없으며, 진리를 말할 필요도 없다. 시가 꼭 경험문학일 필요도 없으며, 더구나 가족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회상조여서도 안 된다. 이런 저런 강의에 나이 드신 수강생들은 종이가 찢어져라 받아 적으며 열정을 보이시니 가르치는 필자는 더욱 힘도 나고 사명감도 느낀다.
오후 4시 반쯤, 시창작강좌 야외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구파발 삼거리를 지나 서울로 진입해 들어오는데 길 건너편에 태극기가 떨어진 것이 눈에 뜨였다. 차량들이 씽씽 달리는데 건너편에 있어서 안타깝지만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오늘은 낮에는 선생으로 밤에는 학생 신분으로, 늦게 시작한 중앙대 예술대학원 야간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또다시 태극기가 생각났다. 불현듯 차를 돌려 그 장소로 가보았다. 태극기는 여전히 수많은 차량들이 지나갔음에도 그리 발자국이 나지 않은 채 차량의 바람에 밀려나 있었다. 태극기는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내가 본 이후로도 무려 7시간 동안 길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돈이나 빈 종이상자가 떨어졌더라면 벌써 주워갔을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길에 쓰려져 계신데 모셔가지 않는 자식들처럼 생각되었다. 차량들이야 못 보고 지나쳤다고 치자. 한창 공사 중인 신도시이기에 통행이 빈번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태극기에 혈서를 쓰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안창호, 윤봉길, 윤동주, 최익현, 무명용사 등, 선열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갔다.
다른 때도 아니고 삼일절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열흘이 더 흘러 비가 내리는 밤이다. 퇴근할 때 보니 무슨 이유인지 거리엔, 아직도 삼일절에 걸어놓은 태극기를 회수하지 않아 비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지금 이 어둠 속에서 태극기들이 비에 젖고 있겠지…….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어떻게 찾은 조국인가? 어떻게 지킨 평화인가? 나라를 생각지 않고,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시를 다시 생각해본다. 시에서 애국심이 꼭 드러날 필요는 없겠지만 시 전반에 깔린 정신, 작가의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이 애국심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릴 적, 큰아들인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그 어려운 보릿고개에도 어떻게 장만하셨는지 품을 팔아 광목으로 된 태극기를 사다 사립문에 걸어주셨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동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를 동생들에게 가르치며 불렀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중 3때 돌아가셨지만 나는 지금도 어머니께서 사신 그 태극기를 가지고 있다. 새어머니들이 여러분 드난하고, 나의 소년시절은 고단했다. 그래도 나는 공장으로 자취방으로 군대로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살았었다.
이제 내가 보관해야 할 태극기는 두 개다. 하나는 1968년에 어머니가 사신 어머니의 유품인 태극기이고, 하나는 2009년 삼일절에 땅에 떨어진 태극기이다. 어머니의 태극기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가슴에 펄럭였다. 이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내 마음에 걸 차례다. 태극기는 잠시 떨어져 지나는 차량에게 밟혀도 조국은 다른 나라의 발굽에 밟히지 않도록 마음의 태극기를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내가 순진하지 않은데 이름만 순진이라며 안순진이라 놀린다. 난 그 별명이 좋다. 마치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 된 기분이라서.<김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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