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넘어가다보니 길섶에 파랗게 핀 산수국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애처로운 처녀의 영혼을 닮은 듯한 산수국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가슴이 저려온다. 애절한 눈빛처럼 흔들리는 헛꽃은 다하지 못한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을 펼쳐 보이는 것만 같다.
수국가지에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면 대기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봉오리가 열리면서 자잘한 참꽃 주변에 헛꽃이 제 모습을 갖추면 곤충들이 날아와 참꽃과 헛꽃사이를 분주히 옮겨 다닌다. 수국은 시리도록 파랗게 잎사귀를 물들이며 한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렇게 수국과 곤충들이 밀월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대기는 품었던 물기를 풀어놓을 준비를 한다.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지면서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국은 장마를 알리는 꽃이다. 제주에서는 산수국을 집안에 심지 않았다. 산수국을 집안에 심으면 집안으로 물이 들어온다는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것이 산수국은 물과 습기를 좋아해 물이 많은 곳으로 뿌리를 내린다. 아마도 꽃의 특성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물기를 좋아하는 것이 산수국만은 아닐 것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에 목숨 줄을 대고 있는 모든 것은 물과 가까이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산수국 앞에 앉아 온갖 시름에 젖는 동안 사람들은 지나가며 무심한 눈길만 보내다 거두어가기도 하고 덩달아 옆에 서서 이름을 물어보며 산수국을 감상하기도 한다.

흐벅지게 핀 산수국 오져서 / 차마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 가담가담 오시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여우비 갈맷빛 이파리마다 조롱조롱/ 매달려 가슴 졸이는 물방울 // 나에게도 산수국처럼 탐스러웠던/ 시절 있었지 물방울처럼 매달렸던/ 사랑 있었지 오지고 오졌던 시절/ 한 삶이 아름다웠지/ 한 삶이 눈물겨웠지 - 허형만 (산수국) 전문.

우리의 삶도 더 이상 분노하거나 한심스럽지 않고 아름답고 눈물겨웠던 시절로 기억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며 산허리 길섶에서 돌아섰다. 산수국의 헛꽃이 파리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는 곳은 달랐고 비는 축축히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