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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에 어머니와 누님 희생
①-한라산 봉화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턱 오름마다 봉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붉게 타올랐다. 무장봉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좌익 무장 자위대는 이날 새벽에 제주도의 24개 지서들 가운데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즉 제1구(제주) 경찰서 관내 화북·삼양·조천·세화·외도·애월·한림 지서와 제2구(서귀포) 경찰서 관내 남원·성산포·대정 지서 등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급습을 받고 경찰은 교전도 못한 채 무장대가 휘두른 곤봉에 타박상을 당했다. 지서를 습격한 사람들은 유치장에서 피의자들을 풀어주고, 무기를 빼앗아 시가지로 행진하며 총을 난사하고, 경찰·서북청년단 숙사와 독립촉성국민회·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고,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열여덟 살 누님의 목소리
1948년 4월 3일 새벽에 그렇게 봉기한 <제주 4·3사건>은 평화롭던 우리 집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을 위해 싸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집에 온 나는 누님에게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자랑했다.
“누나, 공산주의를 하면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해.”
“누가 그런 말을 해?”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그랬어.”
바로 그 1948년 12월 12일에 갑자기 집에 불이 붙었다. 동네가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우리 가족은 동네에 있는 밭으로 달아나 자세를 낮추고 숨었다. 집에서 정신없이 뛰쳐나오느라고 그때까지 나는 맨발이었다. 누님은 자기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벗어서 나에게 건네주며 나더러 신으라고 했다. 나는 누님에게 신발을 돌려주었다. 막내를 품에 안은 어머니와 형, 누님과 내가 숨을 죽이고 돌담 밑 밭에 숨어서 보니, 동네가 불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무장대원 두 명이 우리들에게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애들아, 어서 달아나라.”
무장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어머니가 우리더러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형이 먼저 뛰고, 나도 따라 뛰고, 누님도 뛰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뛰면서 돌아보니, 어머니가 등에 죽창에 찔린 채 쓰러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놀라서 누님은 걸음을 멈추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에 죽창이 누님의 가슴을 찔렀다. 어머니는 막내를 품에 안은 채 등에 죽창을 일곱 번 맞으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무장대원은 누님의 가슴에 죽창을 한 번 더 찌르더니, 이번에는 나와 형을 향해 죽창을 들고 달려왔다.
나와 형은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주도 밭에는 가장자리에 돌담을 쌓아 바람을 막고 있는데, 나는 밭 끄트머리의 돌담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그리고는 내 키 정도 높이의 돌담을 한 번에 훌쩍 뛰어넘었다. 형도 돌담을 한 번에 뛰어넘어 달아났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의 힘이 몇 배 더 솟구치는 것을 그때 알았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냈을 그 돌담을 한 번에 훌쩍 넘어서 달아나자, 무장대원 두 사람은 그 담을 넘어오지 못하여 우리를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막내를 가슴에 안고 앞으로 쓰러져서 죽창을 등에 맞는 바람에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창에 찔리는 소리에 놀라며 뒤로 돌아서던 누님은 가슴에 죽창을 두 번이나 찔리면서 현장에서 절명하였다. 내가 맨발로 밭에 서 있는 모습을 알고 자기 신발을 벗어 주던 누님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열여덟 살 누님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고 말았다.
제주도의 눈물
비극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나는 논산훈련소에 이등병으로 입대(1957년)하며 제주도에서 떠났다가 장군으로 진급(1985년)하고 명예롭게 예편(1989년)하여 정치에 입문(1996년)하려고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소년의 가슴으로 품었던 그리운 하늘과 땅과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의구한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굶주림과 가난의 기억을 뒤로하고 관광과 평화의 아름다운 섬으로 다시 태어난 제주도에 이르러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곤 했다. 겉으로 보면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향이지만, 한 걸음만 다가서면 눈물과 한이 묻어났다.
무엇보다도 세월이 많이 흘렀건만 해결이 안 되고 있는 <제주 4·3사건>이 나를 슬프게 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왜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 고통의 정체를 모르는 듯하고, 가해자들은 가해자들대로 변명에 변명을 덧씌우며 그때그때 임기응변을 할 뿐이었다.
나는 <제주 4·3사건>의 현장에서 사랑하는 누님이 절명하는 순간을 목격했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일생을 국군으로 살아온 군인으로서 50년 전의 그 사건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미군정의 경찰서 등을 습격한 무장봉기는 복합적이고 누적된 전사(前史)의 한 기폭점에 불과했다. 아울러, 이날 새벽 이후 6년 6개월 이상 계속된 사건의 진행 또한 일관적이기 보다는 그 성격과 양상을 가름하는 몇 고비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제주도 4·3사건>을 이해하려면 이 사건의 전개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성제 저 ‘이등병에서 장군으로’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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