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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평화 협상
4월 3일 첫 무장봉기가 있고 25일이 경과한 1948년 4월 28일 정오. 경비대 김익렬 연대장은, 모슬포 연대본부에서 장병들을 사열한 다음 무장대와 협상을 위해 지프에 올랐다. 지프에는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와 운전병, 그리고 민간인으로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이 동승하였다.
모슬포를 떠난 지프는 산길 도로를 따라 한라산 쪽으로 향했다. 무장대 쪽에서 지정한 방향으로 향하다 보니 연대 본부에서 15㎞ 가량 떨어진 중산간 마을에 이르렀다. 그 때 소를 몰고 가던 한 목동이 갑자기 소를 길 가운데로 몰아 지프를 가로막았다. 차가 멈추었다. 목동은 정중히 인사하며,
“연대장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목동은 황색기를 흔들며 어디론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곧 목동은,
“저쪽 초등학교로 가라.”고 안내했다.
목동이 알려 준 학교는 구억초등학교였다. 학교에서 모슬포의 연대본부가 빤히 내려다보였다. 학교에서 500여 명의 무장대가, 김익렬 연대장 일행이 운동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장대는 무표정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무장대의 대부분은 농민·청년 남녀이고, 여자가 과반수가 뒬 듯했다. 무기는 미제 카빈이 많고, 일부는 일본의 99식 소총이었다. 모두 합해서 200여 명은 무기를 들고, 나머지는 비무장 맨손이었다.
김익렬 일행은 7평 남짓한 다다밋방으로 안내됐다. 햇빛이 잘 드는 방의 중앙에 예쁘장한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무장대 5∼6명이 일행을 맞이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군계일학 같은 수려한 미모에 키 170cm 쯤 되는 청년이 나섰다. 대표자 김달삼이었다. 또박또박한 서울 말씨였다.
“앉으시오. 내가 대표자요. 김달삼이라고 하오.”
당시 김 중령은 27살, 김달삼은 25살이었다.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대정중 교사였던 그는 1947년 3·1사건 때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도당에 총파업을 건의하였고, 그 후 도당 조직부 차장, 조직부장으로 급부상했다. 무장투쟁이 결정된 다음에는 유격대 조직을 총괄하는 군사부 책임을 맡고 있었다. 나이 어린 김달삼이 이처럼 부상한 데에는 남로당 중앙위원이자 선전부장이었던 장인 강문석의 후광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냐?”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도 미남이고 영화배우 같아 내가 상상하던 살인을 하는 무시무시한 사람 같지 않다.”
김달삼은 미소만 지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한 시간 가량 탐색전을 했다. 차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면서 탐색을 위한 잡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담장에는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총책 김달삼과 참모 1명 등 모두 4명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자리를 같이 했다. 네 사람의 협상은 주로 김익렬과 김달삼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산에서 의식주나 통신 등 불편이 많겠다.”
“그렇지 않다. 만사가 OK다.”
“부상자도 많을 텐데 의료품을 도와줄 수도 있다. 당신네들은 병원도 없으니 치료가 잘 안 될 것이 아니냐.”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우리는 총을 맞아도 된장 바르면 잘 나을 수 있다. 싸우다 총 맞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된장 바르니 잘 낫더라.”
“왜 이렇게 우리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우리도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 우리가 어디 사는 것이냐. 자고 나면 경찰이나 서청이 와서 다 빼앗아가고 해서 못 사니까, 우리가 자위권을 발동하여 산에 올라온 것이 아니냐.”
“경비대가 아직까지 당신들을 토벌치 않은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군대가 우리의 궐기동기를 이해하여 우리에게 동정과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부에서도 토벌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군대는 개인의 뜻에 상관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해야 한다. 만일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번에는 당신과 전투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이 경찰과 교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3다의 제주도에서 돌담을 끼고 사격전을 벌이면 한쪽에 피해가 많고 토벌에는 효력이 없는 것을 알았다. 나는 돌담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박격포가 제일 좋은 무기인 줄 깨달았다. 그래서 상부에 신청을 했더니 박격포부대를 보내 주겠다기에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순간 김달삼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시 9연대는 물론이거니와 경비대 총사령부에도 박격포는 단 1문도 없었다. 물론 박격포부대가 내도할 것이라는 김 연대장의 말은 엄포용이었다.
탐색전으로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리자 김달삼이 회중시계를 꺼내놓고 “자, 얘기를 정식으로 합시다.”고 회담을 독촉, 본격적인 담판에 들어갔다. 김달삼이 먼저 김 연대장에게 회담 권한 자격 문제를 따졌다.
“당신은 미군정 하의 조선인 군인이다.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약속이행 권한이 있는가?”
“연대장이 개인자격으로 이런 회담에 나올 권한은 없는 법이다. 나는 미군정 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다. 그러므로 군정장관 딘 소장의 권한을 대표하며, 여기서의 나의 발언이나 결정은 군정장관의 그것이다.”
김 연대장이 개인자격이 아니고 미군정의 대표성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회담이 된다.”면서 김달삼은 자신도 ‘제주도 도민 의거자’의 대표로서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런 다음 미리 준비했던 노트의 메모를 보면서 봉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열변을 토했다. 김달삼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가 민족자주독립을 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민족반역자인 경찰과 일제의 고관을 지낸 자들이 자기들의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국제국주의자의 주구가 되어 해방된 조국의 제주도에서도 일제시대의 몇 배 되는 압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찰은 무고한 도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인·강간·고문치사 등을 일삼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또 만주와 이북에서 일제 때 악질 경찰이나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던 자들이 월남하여 반공애국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수백 명이 제주도에 와서 경찰과 합세하여 도민의 재산약탈을 자행하고 있다. 그래서 선량한 도민들은 견디다 못해 친일파와 일제시대의 악질 경찰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 의거를 일으켰다. 미군정은 이 의거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제주도 내에 있는 일제 경찰과 민족반역자 관리들은 축출하고 제주 도민으로 된 경찰과 관리를 채용, 제주 도민을 위한 행정과 치안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일반이니 최후의 1인까지 사투하여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홍성제 저 ‘이등병에서 장군으로’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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