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는 길

김익렬 연대장은 어쨌든 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뜻을 두고 김달삼을 설득했다. 김 연대장은 최종적으로 김달삼에게 무장을 해제해 무기를 반납하고 양민들을 하산시키면 주모자들이 제주에서 떠날 수 있게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배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물론 이런 안에 대해서 사전에 미군 당국이나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와 구체적으로 의논했던 사실은 없었다. 다만 무장을 해제시키고 주모자들을 제주에서 격리시키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확신하여 그런 약속을 했다.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행위의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 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합의된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김달삼에게 이날 회담 결과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오늘의 약속은 나의 생명과 명예를 걸고 이행하도록 힘쓰겠다.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내 가족 전원을 당신들에게 인질로 맡길 수도 있다.”
김 연대장의 가족으로 노모와 부인(최재선), 그리고 두 살 난 아들이 9연대 주둔지인 모슬포에 살고 있었다. 김 연대장의 제의에 김달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편한 이곳에서는 노모와 부녀자를 모실 수 없으니, 만약 약속이 이행된다면 내가 지정하는 민가에 이주시키되 주변에 군인이나 경찰은 얼씬하지 말라, 우리가 감시하도록 하겠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이날 협상은 대체적으로 당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합의를 보고 끝났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진땀나는 담판이었다.
김 연대장은 모슬포 연대본부에 귀대하여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회담결과를 보고하였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는 김 중령의 보고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비록 일시적인 일이었지만 제주도 군정장관의 명령에 따라 경찰은 자체 건물 경비에 치중하고, 그 밖의 지역 전체의 치안 책임은 경비대에 일임되었다.  
김 연대장과 김달삼의 담판이 있었던 그날 이후 제주도에서는 대체적으로 총성이 멎었다. 협상 다음 날 연소자와 부녀자 몇 명이 사용 불능의 낡은 총 몇 자루를 가지고 새로 마련된 귀순자 수용소에 찾아왔을 뿐 무장대의 귀순과 무장 해제는 지지 부진이었다. 그러나 군이 이들을 손님 모시듯 잘 보살피고 귀가 희망자는 보내 주었더니, 귀순하려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연대 병사들도 신이 나서 천막 치는 작업을 즐거이 해냈다. 
제주도에 다시 평화가 온 듯했다. 그러나 평화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오라리 방화 사건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 메이데이. 평화 협상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오라리 방화 사건>이었다. 제주 읍에서 2㎞가량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에 청년들이 들어와 10여 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단순한 방화 사건이 아니었다. 

  평화에서 토벌로 선회 
9연대와 무장대의 평화 협상(4월 28일)에 찬물을 끼얹은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한 직후의 5월 5일 제주 군정청 회의실에서  최고수뇌회의가 비밀리에 열렸다. 회의 참석자는 모두 9명이었다.

·군정장관 딘 소장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주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군 전속통역관 김모

미군정 당국의 행정수반이던 딘 장군을 비롯해 군과 경찰의 최고 수뇌부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회의의 사회는 맨스필드가 맡았다. 맨스필드 대령은 회의를 시작하면서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다. 누설자는 군정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최천 경찰감찰청장이 먼저 상황 설명을 했다. 그는 <제주도 4·3사건>의 원인을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사전에 계획한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군·경 합동작전만이 사태를 진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익렬 연대장이 두 번째로 상황 설명을 했다. 김 연대장은, <제주도 4·3사건>의 원인이 복합적인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원인은 경찰의 실책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 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일방은 회유와 선무를 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에 한해서 토벌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건의했다.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제주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있도록 해 주십시오.”
김익렬 연대장은 <오라리 방화 사건>에서 경찰의 행동을 의심할 만한 물적 증거물과 사진첩을 제시했다. 영문 설명서까지 첨부한 이 사진첩 등은 회의에 앞서 맨스필드 대령과 9연대 고문 드루스 대위가 도군정 본부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상황 설명을 잘하라면서 김익렬 연대장에게 건네 준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