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막연한 생각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이 이리저리 엇갈린다. 터를 고르며 목재며 벽돌, 사소한 재료까지 구입하여 집을 지을 땐 평생을 살리라 생각했다. 값비싼 재료를 쓴 것도 아니고 치장도 없이 좁고 어둑했지만 아이들이 제 방을 가질 수 있어서 흐뭇했다. 2.3년 내로 이층을 올리려던 계획은 조그만 다락방을 들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곳에서 딸들은 책을 읽고 꿈을 꾸었다.

집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집지킴이다. 집을 지은 이듬해에 묘목을 심어 가꾸었다. 앞집 벽이 너무 가까워“나무 그림이라도 그렸으면 좋겠다”라고 중얼거리던 말을 잊지 않고 남편이 출장길에 어렵게 구해 온 것이다. 일본 목련이라는 이름이 거슬려 한동안 이름대기를 어물거리다가, 한계를 넘지 못하는 속 좁은 생각이라 웃어 넘겼다.

나무는 속내를 아는지 의연하게 품위 있는 자태로 자라서 보는 이마다 좋아했다. 사월이면 잎 봉오리를 봉긋하게 맺어 느긋하게 음미하다 툭하고 입을 열면 연둣빛 꽃이 피듯이 잎이 활짝 피었다.

한 봉오리에서 갓난아기의 손바닥만 한 보드라운 잎 대여섯 장이 피어나, 점차 어른손바닥만한 잎이 살랑거린다. 여린 잎에 윤기가 오르면 우리 집은 푸르게 푸르게 물들어 갔다. 비가 오면 리듬을 타고 바람이 머물면 새들이 찾아와 노래하며 쉬어 갔다.

오월이면 피는 흰 꽃이 복스럽다. 봄의 절정을 타고 녹색의 향연을 축하하러 찾아온 계절의 전령처럼 수더분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향기로 고운 잎을 더욱 빛나게 했다.

불볕더위에 쩔쩔매면서도 대놓고 여름을 나무라지 못한 것은 나무의 덕이었다. 크고 두꺼운 잎이 갈색으로 물들고 잎맥이 도드라지면 굵은 실핏줄을 드러낸 할머니의 손등을 닮아서 앙상하다. 모두 내어주고 사그라지는 매무새를 다듬으며 새봄을 기다린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둥지를 떠났고, 주위에는 높은 건물이 하나 둘 들어섰다. 조용하던 동네는 밤이 낮으로 변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빠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날이 늘었다. 사람을 따라 집까지 낡아서 여기저기 손길을 가다렸다. 점점 마음의 여유를 잃어갔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뭇잎을 거두고 나서 이사준비를 했다. 집안 정리에 손을 대자 곳곳에서 잡동사니들이 쏟아졌다. 차마 버리지 못한 것이 짐이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뭉뚱그려 버리려던 생각을 돌려서 지난 흔적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살아온 이야기들이 자질구레하게 펼쳐지고 추억이 된 시간이 올올이 고개를 들었다.

네 자매의 자취를 더듬으며 또 놀랐다. 오래된 교과서, 낡은 참고서, 공책, 종합장, 스케치북, 교복, 단복, 서투른 솜씨의 각종 작품, 상장, 메달, 교표, 명찰, 몽당연필 무더기 등 하나하나 가슴속을 파고들어 명치끝이 아리고 긴 시간 속으로 빠져 들었다.

엄마노릇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겹겹이 쌓였다.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 엄마이면서도 충분히 아끼고 절실할 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아이들은 떠났고, 엉겁결에 떠나보내서 그게 내내 네 자매의 그림자를 붙들고 미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버리는 것과 씨름을 했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마음의 창고를 점령한 어리석음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헤어져야하고, 세상에 밀려나는 것 같은 두려움이 화를 돋우었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듯이 내 안의 어리석음도 털어내면 좋으련만…….

나이 들어 터전을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나 또 다른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이들은 가보지 않고도 길을 탄탄이 다지는데, 훤히 보이는 길에서조차 허둥대며 두리번거린다. 오르막은 여러 갈래 길이어서 서로 다른 길을 내지만, 내리막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비탈진 외길이다.

비록 걸어 온 길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도 육십여 년을 넘어 올 수 있어서 고맙고 소중하다.

이제 눈부신 오월과 맑은 가을 하늘을 몇 번이나 더 반길 수 있을지 모른다. 할 수 있다면 버리는 연습을 길들여서 두려움 없이 내일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루를 영원처럼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을 꾸며 이삿짐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