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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가을을 고대하며
김용길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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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4  16: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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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길 시인
모두 선선한 바람을 그리워한다.

‘입추가 지났으니’, ‘비가 좀 왔으니까’, ‘아침저녁으로 좀 서늘한 기운이’, ‘여름이 이젠 끝날 즈음인데’ 등등 기대를 해보았지만, 요즘 기상예보를 들여다보면 이 더위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올해 기상을 분석한 내용들을 보면 한반도의 여름은 5월에 시작, 9월에서 늦게는 10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다. 가을이 우리에게 다가올 틈이 없다.

23일이 처서(處暑)였다.

처서는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들며, 음력 7월 15일 무렵 이후에 든다. 여름이 지나면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정도로 여름이 가고 가을이 드는 계절의 엄연한 순행을 드러내는 때이다.

그런데 점점 처서가 무의미한 절기가 되는 듯하다. 입추 이후 내렸던 비가 21일을 끝으로 그치면서 중부지방은 다시 최저, 최고기온이 올라갔고, 남부지방은 다시 폭염과 열대야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열대야가 쭉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다 추분까지 열대야 계속되는 거 아닌가 걱정된다.

그래서 처서에 비라도 내렸으면 기원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남부 쪽은 빼고 전국적으로 비 예보도 있었더랬다.

허나 옛 세시풍속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처서의 비를 달가워하지 않은 듯하다.

농사의 풍흉에 대한 조상들의 관심은 크기 때문에 처서의 날씨에 대한 관심도 컸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고 한다.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고 하는데, 처서비에 ‘십리에 천석 감한다’고 하거나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의 든 쌀이 줄어든다’고 한다. 처서에 비가 오면 그동안 잘 자라던 곡식도 흉작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맑은 바람과 왕성한 햇살을 받아야만 나락이 입을 벌려 꽃을 올리고 나불거려야 하는데, 비가 내리면 나락에 빗물이 들어가고 결국 제대로 자라지 못해 썩기 때문이다.

처서를 맞이해 이렇게 가을을 고대한 적이 있던가.

보통 이들이 피서하기 좋은 곳으로 바다를 향하지만, 이제 바다만 보면 여름이 각인될 정도이니, 가을의 서늘함을 미리 느끼기 위해 숲길을 향해보는 건 어떨까 한다.

제주에는 800살 이상 된 가을을 품은 숲, 비자림이 있다. 평대리 위쪽에 있는 이곳은 천연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숲길도 가을빛으로 시원히 조성돼 있다. 오래된 나무의 짙은 초록색과 빠알간 송이 흙길로 다져놔서 기분 좋게 걸을 수 있게 해준다.

다 자란 비자나무의 키는 7~14m이고 둘레는 한 사람이 두 팔로 안아 양 손을 잡을 수 있거나 조금 모자란 정도이다. 비자림에는 28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있다. 게다가 풍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난과 식물들, 그리고 곰솔나무, 후박나무, 단풍목 등 다양한 수종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에 들어가 한적히 소요(逍遙)하고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남짓. 어느새 몸의 열기는 모두 빠져나가 심신은 새롭고 서늘한 생기를 채울 수 있다.

비자림 외에도 제주에는 천연의 숲이 곳곳에 있다. 한라산과 오름들의 속살을 이루고 있는 숲에는 아직 가을의 기억을 풍요롭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니, 아직까지 우뚝 서 있어 우리 곁에 그늘을 드리워지는 나무들에게 감사의 포옹을 하고 싶다.

오늘 이 끝나지 않을 듯 여름에 숲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높아질 하늘과 하얀 억새를 흔들 가을바람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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