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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불꽃
김광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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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4  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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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렬 시인
내 앞에 어떤 오름 사진이 있다. 작은 솔박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이다. 능선 아래쪽은 이미 새까만 어둠이 점령했지만, 하늘은 아직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 사이로 풀잎들은 하늘로 승천하려는 듯 능선따라 하늘하늘 일어서며 거뭇거뭇 바람에 나부끼고, 거뭇거뭇한 풀잎들 사이에는 빛의 잔영이 톱날처럼 물려 있어서 마치 둥그렇게 휘어지며 뻗어나간 톱니바퀴 같다. 능선의 끝과 끝 부분에 외따로이 서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서로 그리워하나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연인처럼 아련하다. 오름의 능선을 경계로 천상과 지상의 빛과 어둠이 풀어내는 대조적 분위기가 나를 아주 낯선 세계로 데려간다.

내가 보기에 그 사진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의미 없는 표현이란 없다. 그 사진작가는 무엇을 필름에 담고자 했을까. 어떤 마음을 그 대상에게 주고 싶었을까. 어떤 마음을 그 대상으로부터 얻고 싶었을까. 그리고 세상에 남겨두고 싶었을까. 그냥 오름이라는 자연을 필름에 담아두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꼈을까. 빛과 시간과 날씨와 그 대상이 만나 이루어지는 자연현상을 단지 필름에 기록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의 고독한 내면을 자연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헤매 다닌 들판과 오름, 그가 마주친 빛과 어둠, 맑음과 흐림,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의 이미지들, 그 모든 것들을 응집하고 싶은 열망이 침묵 속의 불꽃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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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달마을에는 김영갑 갤러리가 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삼달초등학교 분교가 그 자리다. 그곳에는 고인이 된 김영갑이 제주 들판과 오름을 헤매 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그 사진들의 예술성 유무를 내 능력으로는 진단하기 어렵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는 적어도 잠자는 제주의 들판과 오름을 깨워 일으켰다는 점이다. 사물은 누가 깨워 일으키지 않으면 그저 잠자는 존재일 뿐이다. 존재하지만 존재의 의미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상태, 마치 나는 여기에 있으나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비록 살아 있으나 영원히 잠자는 존재와 다름없는 것처럼.    

잠자는 존재는 죽은 존재와 같다. 죽은 존재까지 깨워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어쩌면 바로 예술가가 아닐까. 예술가의 손길이, 마음이, 혼이, 죽은 것들에게 다가가 어떤 예술가는 글로, 어떤 예술가는 그림으로, 어떤 예술가는 음악으로, 어떤 예술가는 춤으로, 어떤 예술가는 사진으로 깨워 일으킨다. 잠자고 있거나 죽어있는 것들에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그것은 살아서 우리 곁으로 온다. 그러므로 예술가에 의해 탄생한 사물 또는 자연은 이제, 생명과 영혼을 지닌 존재로 다시금 우리 눈앞에 부활한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 없지만 그는 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내가 감상하고 있는 사진들 속을 걸어가는 그의 몸짓이 보이고,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눈동자가 보이고, 카메라가 보이고, 순간을 노리는 맹수처럼 찰나를 기다리고 가다듬는 매서운 숨결이 느껴진다. 찰칵, 하고 돌아가는 셔터소리 속에 찍히는 피사체가 감각된다. 안개가 번지고, 수채화처럼 바람에 흐르는 풀잎과 나무들이 보이고, 잔뜩 흐린 하늘에는 먹장구름 몇 떠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침울하게 한다. 바로 그곳에 죽은 김영갑이 살아있다.

그를 제주자연사진작가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갈 곳 없는 극한 상황이 그 길을 걸어가게 했을까. 이 길을 걷지 않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일에 매달렸을까. 그러고 보면 예술가는 세계를 깨우는 자다. 세상은 예술가를 버려도 예술가는 세계를 버리지 않는다. 예술가는 안에 뜨거운 불꽃을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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