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기철 시인

얼마 전 노후된 어느 아파트 단지를 철거하는데 서울시가 단지 중 1개 동을 미래유산으로 하기 위해 남겨두라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제주시 화북동 별도봉 아래 있는 원명선원이었다. 별도천 옆에 자리해 태풍 나리호 때 침수된 후 철거 직전에 있다. 그 후 하천을 정비해 지금은 침수 위험이 거의 없다고 한다.

원명선원은 예전엔 원명사(圓明寺)로 1952년에 세워졌고, 태연스님이 주지로 와 1963년 3층 슬라브 건물을 지어 불교 현대화의 표본으로 당시 크게 주목을 받았었다. 1965년부터 2년간 거기 살았던 나는 모든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한적하지만 당시 늘 많은 객스님으로 북적였다. 1층은 베나레스도서관 서고와 교실 한 칸으로 거기 금강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 그 옆방에 머물고 있던 고은 시인이 교장 겸 국어, 미술을 가르쳤다.

그 무렵 고은 제2시집 『해변의 韻文集』(신구문화사)이 나왔다. 고향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 세트에 있는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한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따왔으리라. 그는 시내로 나갔다가 자주 사라봉과 별도봉 공동묘지 사잇길로 돌아왔다.

‘…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나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리라./지난밤 모든 벌레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가을 아침, 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祭日을 하나 남겼을 뿐/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고은, ‘墓地頌’)

이 시를 비롯해 ‘濟州滿潮’ ‘海軟風’ ‘저문 別刀原에서’ 등은 여기 내음이 물씬 난다. 시집 『해변의 운문집』에는 제주에서 잉태된 시들이 많다. 1967년에 낸 시집 『濟州歌集』도 그렇다. 나는 그의 시집 수십 권에서 이 두 시집을 가장 좋아한다. 평론가 김현 같은 이도 그의 제주 시대의 시들을 높이 평가했었다. 여기서 4년을 지낸 후 서울로 올라가서 시작된 그의 화곡동 시대 이후의 시들은 시대와의 불화로 목소리가 사뭇 높다. 그의 제주 시대는 도도한 물결로 나아가기 전 은은히 흔들리며 반짝이는 수원(水源) 같은 때가 아니었을까. 거기 원명사가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제주에 들어와 머물다 갔다. 한국전쟁으로 제주에 온 화가 이중섭은 1년 채 못 머물고 떠났지만, 그가 살던 서귀포 초가집이 남아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그의 처절한 예술혼을 기리고 있다. 그 외 유수의 예술가들이 거쳐했던 곳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초 사랑하는 이와의 도피로 제주시 용연 동쪽에 와 몇 달을 머물렀던 박목월 시인이 살았던 초가집도 있었다. 훗날 박목월, 고은 시인이 머물렀던 곳은 좋은 스토리텔링의 장소가 될 만하다.

지난 달 여기 문인들과 일본 문학기행을 가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雪國』의 배경이 된 곳을 가 보았다. 중부 지방, 산맥 이 쪽 군마현은 화창한 날씨였으나 1931년에 만들어진 10㎞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 눈, 눈 세상. 소설 『설국』의 유명한 첫 대목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눈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우리는 작가가 머무르며 『설국』을 썼다는 료간 다카한(高半)에 묵으며 그의 체취를 맡았다. 눈이 계속 퍼 부었다. 이 소설이 없었다면 그저 작은 온천 마을에 불과했을 니가다현의 에치고유자와 마을은 환상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